명문과 단상

예술은 쌓이는게 아니다

수지 문지기 2023. 3. 12. 18:08

나는 노인에게 감탄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해 질 녘 공중목욕탕의 세면장 한구석에서 혼자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보니까, 허술한 일본식 면도날로 수염을 깎고 있다. 거울도 없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침착하게 깎고 있다. 그때만큼은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감탄했다. 수천 번, 수만 번이라는 경험이 노인에게 거울도 없이 손으로 더듬어 가며 얼굴의 수염을 수월하게 깎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렇게 쌓여 온 경험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이길수 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한 뒤로 주의 깊게 살펴보니, 예순이 넘은 집주인 할아버지 역시 뭐든지 모르는 게 없다. 정원수를 옮겨 심는 계절은 장마철이 최고라는 둥, 개미를 퇴치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둥, 대단히 박식하다. 우리보다 마흔 번이나 많은 여름을 맞고, 마흔 번이나 많은 꽃을 보고, 어쨌든 마흔 번,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보아온 것이다. 하지만 예술에 관한 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점찍기 3년, 선긋기 10년' 같은 비장한 수련의 규칙은 옛 장인의 무지한 영웅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쇠는 벌겋게 달구어졌을 때 두드려야 한다. 꽃은 만개했을 때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만성의 예술이라는 것을 부정한다.(생각하는 갈대)


아름다움이란 자연스레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간다고 쌓이는 것도 아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짧게 피어나는 것이다. 예술가는 '그때'를 기다리며 사는 하루 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