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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의 의지

폭우가 연일 쏟아졌던 날 창틀 사이로 빗물이 고였다 빗물은 유리창 밑을 가득 적셔 여닫을 때마다, 끼이익 마찰음 소리를 내고 먼지 섞인 흙과 그 위에 잠들어 있던 날벌레 모기 그리고 알지 못하는 작은 유충을 물에 태워 방에 쏟아 냈다 나는 걸레로 그것을 치우면서야 비가 오면 항상 물이 고이는 걸 알았다 여짓것 뜨거운 태양이 물을 증발시켰는데 이번 폭우는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창문을 열었을 때, 검푸른 사체가 섞인 빗물은 역겨웠다 하지만 그 더러움이 없었다면 빗물이 쌓이는 걸 알지도 못했겠지 어쩌면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보다 추하더라도 꿋꿋하게 존재하는 것이 사랑받는 방법일지 모른다 그것이 혐오일지라도 무관심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폭우 속에서 빗물을 마주했던 나는 빗물의 의지를 배워 오늘 하루를 살아낸다.

2022.08.12

봄에는 새로운 즐거움 찾을 거에요

좋아하는 걸 글로 쓰는 숙제를 받았어요 한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요 달리면서 되뇌고 노트에 끄적여봐도 공백뿐이에요 시간을 되돌려 봤어요 클라우드에 기록된 사진을 스크롤 해봤어요 1년 3년 그리고 7년 지금과는 다르게 미소 짓고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한 제가 보여요 옆에는 더한 그대가 있고요 깨달았어요 그때도 딱히 좋아하는 건 없었다는 걸 단지 당신이 저를 감싸주었고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다는 걸 이제 당신은 멀리 있어요 비행기를 타도 닿을 수 없죠 거리만큼 나는 아득해져요 그쪽이 지워졌으면 좋겠어요 누가 나를 잘게 쪼개 기억과 함께 던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또다시 봄이에요 온기 퍼지는 이 봄 내게도 오늘의 즐거움이 필요해요 떨어지는 벚꽃 나무 밑에 서볼까요 그곳에선 혼자 있어도 꽃이 저를 받..

2022.03.23

*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너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죽인다 무표정하게 앞에 앉아 다른 남자와 카톡을 하고 말도 없이 술집을 나가 전자담배를 빨아댄다 다만 너는 아름답기 때문에 나는 피지 않는 담배를 빌려 너와 함께 빨아댄다 니코틴 때문인가 5월 밤의 기분 좋은 선선함 때문인가 너는 기습적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고 오빠라고 나를 부른다 나는 수많은 오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름답기 때문에 그리고 내 품에 있기 때문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나를 죽이고 간다 카톡에서도 가상공간에서도 사라져 닿지 않는다 이런 엔딩을 예감했다 우린 결이 달라 처음부터 오래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쫓기면서도 빛을 내는 반딧불이처럼 아름다움을 쫓는 것은 나의 본성이기에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너무 아름다웠다. * 나태주 시 제목 ..

2022.02.16

여름밤 청계천에서 너와 나

위험하지도 않은 청계천 징검다리를 손 잡고 걸었다 건너서도 모르는 척 손을 놓지 않았다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분위기 물소리에 녹아내리는 사람들의 대화 냇물에 비추는 몽롱한 야경 그리고 한 손에 잡힐 듯 얇은 발목을 드러내며 곁으로 곁으로 다가오는 네가 좋았다 이 미묘한 공기를 깨고 싶지 않아 대화도 없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한참을 손만 잡고 걸었다 거짓말 가득한 그날 밤 청계천은 더 반짝이고 네가 더 사랑스럽고 나는 더 떨렸다

2022.02.13

붉은 마음

마음에는 색이 있다 색이 섞여 변하듯 마음도 섞여 변한다 무채색인 내게 붉은 네가 와서 난 빨개지고 있다 처음에는 시나브로 약하게 시간 흐를수록 강하고 선명하게 결국 너보다 붉어진 나 이제 색 빠진 너는 붉게 해 줄 빛을 향해 나아가고 이미 붉어져 제가 된 나는 이곳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가엾은 붉은 마음 내 속에 갇혔네* * 빈집(기형도) 마지막 문장 구조 참조

2022.02.06

내 장례식에서는

즐겨듣던 00년대 힙합과 일본 시티 팝을 틀어놓고 슬랙스에 하얀 운동화 그리고 검정색 터틀넥 입혀서 평소의 나처럼 치장해주길 소주 대신 과일 향 가득한 IPA 생맥주 식장 전체에 비치하고 호주에서 촬영한 하버브릿지, 새하얀 유람선 사진 번갈아 틀어놓아 주길 마지막으로 내가 쓴 짧은 글, 목소리 좋은 성우 불러서 감미롭게 낭독해 주길 내 장례식은 오직 나를 위해 축하해주길.

2022.02.01

다만 걷겠습니다

제 눈은 풀려가고 있습니다. 감각은 희미해지고 소리는 약해지고 있습니다. 세상 가득한 적막 때문에 무엇이 현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저는 걷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그곳에 닿으면 알 수 없는 행복이 있을 거라 믿으며 발 옮기고 있습니다. 저는 점점 아득해집니다. 이제 멈추면 될까요? 이제는 포기해도 될까요? 생각하니 편해지고 또 슬퍼집니다. 멈추면 무엇을 할까요? 항상 걸어왔던 삶인데. 멈추면. 그만두면. 저도 사라지는 거 아닐까요. 저기까지만 가보자.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내가 지금 숨쉬기 위해서. 저기까지만 가보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걷기 밖에 없어서. 그렇게 걷다 보면 결국 '저기'에는 닿지 못해도 저는 자연스레 멎어 무섭지 않게 사라질 것 같습니다.

2022.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