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6

사라져버리는 것들(하루키)

1. 지금도 아침 일찍 진구가이엔이나 아사카사고쇼 주변 코스를 달리고 있으면, 그들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코너를 돌면 그들이 맞은편에서 하얀 숨을 내뿜으면서 묵묵히 달려 오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만큼 혹독한 연습을 견뎌온 그들의 생각은, 그들이 품고 있던 희망과 꿈과 계획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하고. 사람의 생각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그다지도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인가, 하고. 2. 오늘은 달리면서 커다랗고 포동포동한 캐나다 거위 한 마리가 찰스 강가에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람쥐도 한 마리 나무 밑동에 죽어 있었다. 깊이 잠든 것처럼 그들은 죽어 있었다. 그 표정은 그저 조용히 생명의 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뭔가로부터 겨우 해방..

명문과 단상 2023.10.08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까?

국민학교 시절, 사촌 누나가 "사람은 다 죽어"라고 내게 말했다. 시크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나는 그때 너무 놀라서 엄마에게 달려가 "정말 모두 죽는거야? 라고 되물었고, 엄마는 아무말 없이 날 안아주었다. 11살 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백구가 얼어 죽고, 휠체어를 타고 놀이터에 오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살아있는 건 결국 사라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단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내 삶에서 죽음은 하나씩 실체화 되었다. 처음엔 이름 모른 친척이 죽었고, 그 다음엔 같이 살던 할머니가, 나보다 어린 사촌동생이 그리고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성당 묘지에 묻으며, 내게 "주님 곁으로 가셨다. 그곳에선 마음대로 걷고, 훈장 노릇을 하며 지낼게다. 이곳보다 좋을거야"라..

편린 2023.02.13

3월 21일 (혼자 있는 시간)

3월 21일, 바람 심함 정학 15일, 방과 후 교무실 청소 15일. 멸치를 떄린 결과이다. 나는 보름 넘는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봄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 처음 며칠은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빌려 읽었다. 시간이 많으니까, 한두 페이지 읽고 주인공 모습을 그려보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도 해보았다. 혼자서 여유롭게 지내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못가 지루해졌다. 수업 중에 몰래 보던 만화책의 재미를 따라갈 수 없었다. 역시 책을 읽고 사색하는 건, 바쁜 와중에 짬을 내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오후 2시가 되면 혼자 집에 남게 된다. 아빠는 새벽에 장사하러, 누나와 엄마도 학교와 방직공장으로 떠난다. 엄마는 11시 정도에 내가 먹을 점심을 준비한 후 나가는..

중2 일기장 2023.01.22

마지막 순간에는 피하지 않을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18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의 마지막 출근길, 오래된 우리 집이 허물어지는 순간, 그리고 아끼던 사람과 작별할 때. 미래를 단정할 순 없지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처럼 마지막을 맞이할 것 같다. 사라지는 게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했을 테니, ‘음... 이제 끝이군’ 되뇌며, 남처럼 상황을 바라볼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거리 두는 법’을 익혔다. 일상을 나눴던 연인이 떠나고, 노력을 기울인 일들이 무의미해지는 경우를 겪으며, 결국 모든 건 사라진다. 남는 건 나 혼자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혼자라면 마음을 다할 필요 없지. 다만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게, 몇 번이고 그때를 먼저 상상하자. 하나가 끝나면 새로운 하나가 시작되고, 삶은..

에세이 2022.12.22

삶과 죽음은 두 개의 경계선이다 (톨스토이-인생독본)

죽은 뒤 영혼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한다면, 태어나기 전의 영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네가 어딘가로 간다면,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온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네가 이 삶으로 왔다면, 분명 어딘가에서 온 것이다. 만약 죽은 뒤에도 살게 된다면 그전에도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죽은 뒤 어디로 갈까?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왔던 곳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거기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거기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죽은 뒤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죽음 뒤에도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본래 있던 자리로 간다는 의미겠지.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

명문과 단상 2022.11.09

사양 - 삶으로 부터 해방

5 그러던 어느날 아침, 나는 무서운 것을 보고 말았다. 어머니의 손이 부어 있었다. 이런 손은 어머니의 손이 아니다. 낯선 아주머니의 손이다. 내 어머니의 손은 훨씬 가늘고 자그마한 손이다. 내가 잘 아는 손. 부드러운 손. 귀여운 손. 그 손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일까. "신문에 폐하의 사진이 실린 모양인데, 한 번 더 보여주렴." 나는 신문의 그 부분을 어머니 얼굴 위에 펼쳐 들었다. "늙으셨구나." "아니에요, 사진이 안 좋아요. 지난번 사진에는 아주 젊고 쾌활해 보였어요. 오히려 이런 시대를 기뻐하시겠죠." "어째서?" "그야, 폐하도 이번에 해방이 되셨잖아요." 어머니는 쓸쓸히 웃으셨다. 그러고는 잠시 후, "울고 싶어도, 이제 눈물이 안나." 나는 지금 어머니가 행복한게 아닐까, 하고 문득..

명문과 단상 202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