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22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까?

국민학교 시절, 사촌 누나가 "사람은 다 죽어"라고 내게 말했다. 시크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나는 그때 너무 놀라서 엄마에게 달려가 "정말 모두 죽는거야? 라고 되물었고, 엄마는 아무말 없이 날 안아주었다. 11살 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백구가 얼어 죽고, 휠체어를 타고 놀이터에 오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살아있는 건 결국 사라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단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내 삶에서 죽음은 하나씩 실체화 되었다. 처음엔 이름 모른 친척이 죽었고, 그 다음엔 같이 살던 할머니가, 나보다 어린 사촌동생이 그리고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성당 묘지에 묻으며, 내게 "주님 곁으로 가셨다. 그곳에선 마음대로 걷고, 훈장 노릇을 하며 지낼게다. 이곳보다 좋을거야"라..

편린 2023.02.13

정신승리와 자기 혐오의 사이에서

나는 약한 사람이다. 세상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두려워서 정신 승리를 한다. 나는 사람에게 둘러싸여 사랑받는다. 내가 말려도 사람들은 날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나는 그들이 반목하는 걸 슬퍼한다. 그리고 방구석에 누워 창조해낸 세계를 보며 미소 짓는다. 나는 약한 사람이다. 세상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두려워서 자기혐오를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더러운 집에서 혼자 죽는 걸 상상한다. 내 삶은 착실히 나빠져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난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스스로를 비웃는다. 환상의 세계로 도망간다. 끝없이,

편린 2022.12.25

정신 패배(?)의 날

어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글이 좋아지고, 어떤 사람은 아예 쓰지 않게 된다. 한 번도 감탄해본 적 없는 사람의 글. 언제나 감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던 글이, 오늘은 좋았다. 사랑을 한다고 하더니 과연, '사랑'이란 단어가 하나도 없는데 그 모습을 느끼게 만든다. 본래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나? 나는 누군가에 빠지면, 평소 쓰던 단어도 생각나지 않고 한 문장도 적을 수 없는데. 손에 쥔 행복이 사라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다, 아 이제 사랑이 떠나는군 느낌이 오면, 연애편지 비슷한 것을 적어 보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시간이 흐른 뒤 감정을 하나씩 떠올리며 글로 옮기는데, 이 사람은 사랑을 하며 글이 함께 밝아지고 있다. 마음이 온전히 하나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혼자 패배감에 젖었다.

편린 2022.11.12

추천 편지, 아버지에게

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드디어 이사를 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혼자 계셨는데, 이제 마음이 바뀌셨는지 함께 산다고 하십니다. 늘 그렇듯 할머니는 소리 높여 찬송가를 트시는데 할아버지가 잘 버티실지 걱정입니다. 이사 날에는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깔끔하게 준비된 할머니 옆방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날은 예보에 없던 가을비가 내려 손은 차고 물에 젖은 발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이상하지요. 왜 이사 날에는 항상 비가 오는지. 아버지 오늘은 가을이 끝나는 날 상강(霜降)입니다. 저는 어제처럼 얇은 가디건을 입고 밖을 나왔는데, 새벽 공기에 몸이 떨리며 문득 아버지의 이사 날이 떠올랐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던 이슬비, 잔디 위에 고인 투명한 물방울, 그리고 사람들이 담배처럼 ..

편린 2022.10.26

패배를 인정합니다

2022년 10월 10일 (쌀쌀한 비, 마음 우울) S/W 자격시험 최종 탈락. 보기 좋게 실패했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라 오히려 홀가분 한 기분이 들어. 이번 시험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어.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기." 내게도 행운이 있는지 시험해보았어. 지나간 모든 성취는 나를 갈아 넣는 노력이 필요했고, 목표 달성 후에는 허무함만 몰려왔어서, 이번만큼은 일상의 행복과 결과를 함께 달성하고 싶었어. 방긋 웃는 여유를 유지한 채 말이야. 하지만 역시 망상에 불과했지. 세상은 단칼에 "안돼. 그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나를 수렁으로 던지려 해. 그래. 나도 알아. 모든 사람이 자기를 뛰어넘으려 노력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 끝없이 헤매는데, 나처럼 설렁설렁해서는 무..

편린 2022.10.10

시험 준비의 명약 정신승리 (뇌의 오류)

2022년 9월 26일 맑음 (정신상태 맑음, 콧물 있음) 오랜 친구에게 비굴한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S/W 자격시험 기출문제 있어? ^^;" 아, 사람이 몰리면 품격이고 자존심이고 사라진다더니, 내가 그렇게 비웃던 중국인 수험생처럼 시험후기를 찾아 헤매고 있구나. 이런 비굴함은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 신님, 동물과 식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나의 파멸을 원하는 듯, 나는 지난번 시험에 떨어져 버렸다. 그것도 얼빵한 중학생이나 할 초보적인 실수(차마 적기도 부끄러운)를 해서 3개월의 노력을 날려버렸다. 나는 안다. 이런 대 실패뒤의 도전은 허무하게 끝난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망하는 흐름 위에 있어서 정석으로는 합격이 불가능하다. 지금은 ..

편린 2022.09.26

내 세계를 형성하련다

2022년 9월 21일 맑음 (정신상태 맑음, 감기 기운 있음) 일기를 틈틈이 쓰기로 했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 아침 주말에 뭐할까 고민하다 습관처럼 전시회를 찾아봤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전시회나 미술관을 많이 갔지만 별 의미는 없었던 것 같다. 시간 때우기 위해 작품 주변을 서성였을 뿐 감동을 받거나 여운이 남진 않았으니까. 그 이유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나만의 세계가 없어서인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 확인하고 싶은 것, 느끼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작품에도 몰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세계를 만드는 목적이 작품 감상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것보단 내 속에서 꿈틀대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는 어떤 세계를 펼치려 하나? 생각나는 키워드를 노트에 적어 ..

편린 2022.09.21

올 가을도 춥다

한국은 벌써 가을입니다. 저는 이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긴소매를 입습니다. 태생적으로 몸이 차가워 기온이 떨어지면 금세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무뎌지는데, 그때부터 흘러버린 시간의 허무함과 혼자라는 외로움이 커집니다. 그래서 가을이 싫고 겨울이 되면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고 싶어 진답니다. 머, 떠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지만요. 올해는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만남을 해봤고 데이팅 앱에서 마음이 통했던 사람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제가 아름답지 않아서 인지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특이한 생명체를 대하듯 저를 관조하기만 해서 저는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앞에서는 몇 시간씩 웃고 이야기하는데 돌아서면 자기 생활을 하나도 말해주지 않거나, 바로 어제까지 ..

편린 2022.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