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4

사양 - 나오지의 유서

7 누나. 안 되겠어. 먼저 갑니다. 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걸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살고 싶은 사람만 살면 돼요.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권리도 있을 테죠. 나의 이런 생각은 전혀 새로울 게 없고 너무나 당연해서 그야말로 근원적인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두려워하면서 분명하게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살고 싶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씩씩하게 살아남아야 하고, 이는 멋진 일이며 인간의 명예라는 것도 틀림없이 여기에 있겠지만 죽는 것 또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살아가는데 뭔가 한 가지,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나로선 안간힘을 쓴 겁니다. 누나. 내겐 ..

명문과 단상 2022.09.16

사양 - 삶으로 부터 해방

5 그러던 어느날 아침, 나는 무서운 것을 보고 말았다. 어머니의 손이 부어 있었다. 이런 손은 어머니의 손이 아니다. 낯선 아주머니의 손이다. 내 어머니의 손은 훨씬 가늘고 자그마한 손이다. 내가 잘 아는 손. 부드러운 손. 귀여운 손. 그 손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일까. "신문에 폐하의 사진이 실린 모양인데, 한 번 더 보여주렴." 나는 신문의 그 부분을 어머니 얼굴 위에 펼쳐 들었다. "늙으셨구나." "아니에요, 사진이 안 좋아요. 지난번 사진에는 아주 젊고 쾌활해 보였어요. 오히려 이런 시대를 기뻐하시겠죠." "어째서?" "그야, 폐하도 이번에 해방이 되셨잖아요." 어머니는 쓸쓸히 웃으셨다. 그러고는 잠시 후, "울고 싶어도, 이제 눈물이 안나." 나는 지금 어머니가 행복한게 아닐까, 하고 문득..

명문과 단상 2022.09.14

사양 - 연애 요청 편지

4 6년 전 어느 날 제 가슴에 아스라이 무지개가 걸렸고 그건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무지개 빛깔은 점점 또렷해져서 저는 지금껏 한 번도 그걸 놓친 적이 없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간 맑은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는 이윽고 더 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사람의 가슴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무쪼록 그 분께 물어봐 주세요. 그분은 정말로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그야말로 비 개인 하늘의 무지개처럼 생각하신 걸까요? 그리고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노라고? 맨 처음 올린 편지에 제 가슴에 걸린 무지개에 대해 썼습니다만, 그 무지개는 반딧불, 혹은 별빛처럼 그렇게 고상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토록 멀고 옅은 마음이었다면, 제가 이렇듯 괴로워하지 않고 서서히 당신을 잊을 수 ..

명문과 단상 2022.09.13

사양 - 아무 일도 없었다

2 작년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도 아무 일 없었다. 그 전해에도 아무 일 없었다. 이런 재미있는 시가 전쟁이 끝난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지금 떠올려도 참으로 온갖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역시나 아무 일 없었던 것도 같다. 나는 전쟁에 관한 추억은 이야기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다.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18년 간 몇 번의 이사를 하고 차와 집을 사고 적지 않은 연인을 만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금방 익숙해져서 처음부터 이 상태였던 것 같고, 가족을 꾸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의 기쁨과 의무감도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몸이 쇠약해진 것만 빼곤 근본적으로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아.. 약해진다는 게 돌이킬 수 없는..

명문과 단상 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