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5

죽어가며 쓰는 글 - 병상육척(마사오카 유키)

병상에 누워 몸을 움직일 수 있었을 때는 애써 병이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무심하게 누워서 지냈지만, 요즘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니, 정신의 번민으로 거의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괴로워한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에 이런저런 궁리도 해 보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도 본다. 점점 더 괴롭다. 머리가 우지끈거린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참고 참다가 끝내 파열한다. 이제 이렇게 되면 어쩔 수가 없다. 절규. 통곡. 점점 더 절규한다. 점점 더 통곡한다. 이 괴로움, 이 고통은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차라리 정말로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만약,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무엇보다 내가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죽을 수도 없고, 죽여줄 사..

명문과 단상 2022.12.30

인간, 다자이 내 마음의 문장들

어른이란 외로운 사람이다. 서로 사랑하고 있어도 조심하면서 남남처럼 서먹서먹하게 대해야 한다. 어째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보기 좋게 배신을 당해 큰 창피를 겪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이 발견은 청년이 어른으로 옮겨가는 첫 번째 과정이다. 어른이란 배반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쓰가루) '인간은 왜 서로를 평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이런 소박한 의문에 대해 느긋하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한다. '모래밭의 싸리꽃도, 기어가는 작은 게도, 강가에 쉬는 기러기도, 그 무엇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을 서로 존경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

명문과 단상 2022.11.21

종교의 본질 (인생독본 - 톨스토이)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자신을 이 땅으로 보낸 존재가 누구인지, 그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고 적어도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길 바라 왔다. 종교는 그런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을 하나의 기원과 공통된 삶의 과제와 공통된 궁극의 목적을 가진 형제로 묶어주는 연결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서 등장했다. (마치니) 아무리 원치 않더라도 이 세상과 우리가 결합되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산업과 교역과 예술과 지식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 처지의 동일성이, 세계에 대한 우리 관계의 동일성이 우리를 결합하고 있다. (톨스토이) 모든 종교의 본질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를 둘러싼 무한한 세계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에 있다. 가장 숭고한 종교에서 가장 ..

명문과 단상 2022.10.24

오롯이 버텨야 할 때

여행을 잘하는 사람은 생활에서도 절대 실패하는 법이 없다. 여행이 서투른 사람이 여행하는 동안 가장 쩔쩔맬 때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서 머무는 시간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생에서 몇 시간 동안 '내려와 있는' 상태이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차 안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그래도 끝내 견디지 못해 차에서 내려 자기 힘으로 가겠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소위 '여행을 잘하는' 사람은 차를 타고 있는 동안, 즐긴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 마음을 비울 수는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굉장한 말로 표현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능력이다. 사람들은 이 능력에 전율을 느끼기에는 무척이나 둔하다. 움직임이 있는 것, 그것은 세상의 저널리스트들에게 종종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명문과 단상 2022.10.02

사양 - 아무 일도 없었다

2 작년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도 아무 일 없었다. 그 전해에도 아무 일 없었다. 이런 재미있는 시가 전쟁이 끝난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지금 떠올려도 참으로 온갖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역시나 아무 일 없었던 것도 같다. 나는 전쟁에 관한 추억은 이야기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다.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18년 간 몇 번의 이사를 하고 차와 집을 사고 적지 않은 연인을 만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금방 익숙해져서 처음부터 이 상태였던 것 같고, 가족을 꾸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의 기쁨과 의무감도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몸이 쇠약해진 것만 빼곤 근본적으로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아.. 약해진다는 게 돌이킬 수 없는..

명문과 단상 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