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쓰기 18

봄에는 새로운 즐거움 찾을 거에요

좋아하는 걸 글로 쓰는 숙제를 받았어요 한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요 달리면서 되뇌고 노트에 끄적여봐도 공백뿐이에요 시간을 되돌려 봤어요 클라우드에 기록된 사진을 스크롤 해봤어요 1년 3년 그리고 7년 지금과는 다르게 미소 짓고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한 제가 보여요 옆에는 더한 그대가 있고요 깨달았어요 그때도 딱히 좋아하는 건 없었다는 걸 단지 당신이 저를 감싸주었고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다는 걸 이제 당신은 멀리 있어요 비행기를 타도 닿을 수 없죠 거리만큼 나는 아득해져요 그쪽이 지워졌으면 좋겠어요 누가 나를 잘게 쪼개 기억과 함께 던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또다시 봄이에요 온기 퍼지는 이 봄 내게도 오늘의 즐거움이 필요해요 떨어지는 벚꽃 나무 밑에 서볼까요 그곳에선 혼자 있어도 꽃이 저를 받..

2022.03.23

새벽과 아침 사이에서

3시 30분에 깼다. 정식으로 잠든 적이 없는데 졸았나 보다. 저녁 대신 라면과 만두 그리고 딸기를 먹었고 그 후는 생각나지 않는다. 애매하다. 생각도 몽롱하고 시간은 새벽과 아침에 걸쳐있다. 5시만 되었어도 뛰러 나갈 텐데 지금 달리는 건 미친 짓 같아 방에 있는다. 넷플릭스를 켜고 오래된 애니메이션 시티헌터를 보았다. 그 만화를 처음 본 게 20년 전인데 주인공은 여전히 21살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부러운 놈이다. 나이도 그대로고 주변에는 미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꺼버렸다. 뭘 해야 하나? 거실로 나가니 김이나의 작사법이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젖힌 채 검은 물방울 반점이 있는 흰색 셔츠를 입고, 그보다 빛나는 피부를 가진 작가 사진이 보였다. 40대라고 하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32..

편린 2022.03.06

*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너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죽인다 무표정하게 앞에 앉아 다른 남자와 카톡을 하고 말도 없이 술집을 나가 전자담배를 빨아댄다 다만 너는 아름답기 때문에 나는 피지 않는 담배를 빌려 너와 함께 빨아댄다 니코틴 때문인가 5월 밤의 기분 좋은 선선함 때문인가 너는 기습적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고 오빠라고 나를 부른다 나는 수많은 오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름답기 때문에 그리고 내 품에 있기 때문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나를 죽이고 간다 카톡에서도 가상공간에서도 사라져 닿지 않는다 이런 엔딩을 예감했다 우린 결이 달라 처음부터 오래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쫓기면서도 빛을 내는 반딧불이처럼 아름다움을 쫓는 것은 나의 본성이기에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너무 아름다웠다. * 나태주 시 제목 ..

2022.02.16

붉은 마음

마음에는 색이 있다 색이 섞여 변하듯 마음도 섞여 변한다 무채색인 내게 붉은 네가 와서 난 빨개지고 있다 처음에는 시나브로 약하게 시간 흐를수록 강하고 선명하게 결국 너보다 붉어진 나 이제 색 빠진 너는 붉게 해 줄 빛을 향해 나아가고 이미 붉어져 제가 된 나는 이곳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가엾은 붉은 마음 내 속에 갇혔네* * 빈집(기형도) 마지막 문장 구조 참조

2022.02.06

내 장례식에서는

즐겨듣던 00년대 힙합과 일본 시티 팝을 틀어놓고 슬랙스에 하얀 운동화 그리고 검정색 터틀넥 입혀서 평소의 나처럼 치장해주길 소주 대신 과일 향 가득한 IPA 생맥주 식장 전체에 비치하고 호주에서 촬영한 하버브릿지, 새하얀 유람선 사진 번갈아 틀어놓아 주길 마지막으로 내가 쓴 짧은 글, 목소리 좋은 성우 불러서 감미롭게 낭독해 주길 내 장례식은 오직 나를 위해 축하해주길.

2022.02.01

다만 걷겠습니다

제 눈은 풀려가고 있습니다. 감각은 희미해지고 소리는 약해지고 있습니다. 세상 가득한 적막 때문에 무엇이 현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저는 걷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그곳에 닿으면 알 수 없는 행복이 있을 거라 믿으며 발 옮기고 있습니다. 저는 점점 아득해집니다. 이제 멈추면 될까요? 이제는 포기해도 될까요? 생각하니 편해지고 또 슬퍼집니다. 멈추면 무엇을 할까요? 항상 걸어왔던 삶인데. 멈추면. 그만두면. 저도 사라지는 거 아닐까요. 저기까지만 가보자.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내가 지금 숨쉬기 위해서. 저기까지만 가보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걷기 밖에 없어서. 그렇게 걷다 보면 결국 '저기'에는 닿지 못해도 저는 자연스레 멎어 무섭지 않게 사라질 것 같습니다.

2022.01.26

햇살 가득 토요일

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 반드시 나가야 하는 토요일 아침 가방도 메지 않고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일단 나서보자 버스가 빨리 오면 강북으로 역사 산책 지하철이 빨리 오면 강남에서 사람 구경 식당에서 혼밥과 맥주 한잔하고 알딸딸한 상태로 책을 읽다가 무슨 뜻인지 몰라 카페에서 졸다가 일어나면 벌써 오후 5시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시티 팝을 들으며 집으로 향하는 행복한 "햇살 가득 토요일".

2022.01.23

브람스님에게 묻습니다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유럽 작곡가인듯하고, 미국 지역 이름 같기도 하고, 강남에서 본 맥주 집 같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유명인인 것은 확실해요 유명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요? 존재만으로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당신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타인의 사랑속에서 행복하신가요? 아니면 풍요속의 빈곤을 느끼며 외로우신가요? 제가 알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이 부럽습니다 누군가 브람스 님을 기억해주니까요 저는 시간이 지나면 누가 떠올려줄까요? 아무도 기억 못할 것 같아서 슬픕니다 사실 이글은 브람스 님이 아니라 저에게 쓴겁니다 죽어도 존재하기 위해서 삶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