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모음 7

믿어서 행복에 도달한다

죽음을 이웃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보다도, 한 송이 꽃의 미소가 더 몸에 사무친다. 우리는 지금, 말하지면 아스라한 꽃향기에 이끌려 정체 모를 큰 배에 실려 하늘의 항로를 따라 되는데로 몸을 맡긴 채 나아가고 있다. 하늘의 뜻에 따르는 그 배가 어느 섬에 다다를지, 그건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항해를 믿어야 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이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할 열쇠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죽은 자는 완성되고, 산 자는 출범하는 배의 갑판 위에 서서 죽은 자에게 합장한다. 배는 스르르 바닷가에서 멀어진다 (다자이 오사무 - 판도라의 상자) 마음을 다해서 거짓없이 하루를 살고 싶다.

명문과 단상 2022.10.05

사양 - 나오지의 유서

7 누나. 안 되겠어. 먼저 갑니다. 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걸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살고 싶은 사람만 살면 돼요.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권리도 있을 테죠. 나의 이런 생각은 전혀 새로울 게 없고 너무나 당연해서 그야말로 근원적인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두려워하면서 분명하게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살고 싶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씩씩하게 살아남아야 하고, 이는 멋진 일이며 인간의 명예라는 것도 틀림없이 여기에 있겠지만 죽는 것 또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살아가는데 뭔가 한 가지,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나로선 안간힘을 쓴 겁니다. 누나. 내겐 ..

명문과 단상 2022.09.16

사양 - 삶으로 부터 해방

5 그러던 어느날 아침, 나는 무서운 것을 보고 말았다. 어머니의 손이 부어 있었다. 이런 손은 어머니의 손이 아니다. 낯선 아주머니의 손이다. 내 어머니의 손은 훨씬 가늘고 자그마한 손이다. 내가 잘 아는 손. 부드러운 손. 귀여운 손. 그 손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일까. "신문에 폐하의 사진이 실린 모양인데, 한 번 더 보여주렴." 나는 신문의 그 부분을 어머니 얼굴 위에 펼쳐 들었다. "늙으셨구나." "아니에요, 사진이 안 좋아요. 지난번 사진에는 아주 젊고 쾌활해 보였어요. 오히려 이런 시대를 기뻐하시겠죠." "어째서?" "그야, 폐하도 이번에 해방이 되셨잖아요." 어머니는 쓸쓸히 웃으셨다. 그러고는 잠시 후, "울고 싶어도, 이제 눈물이 안나." 나는 지금 어머니가 행복한게 아닐까, 하고 문득..

명문과 단상 2022.09.14

4.인간 실격 -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세 번째 수기 “끊겠어. 내일부터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을 꺼야.” “정말?” “꼭 끊을꺼야. 끊으면 말이야. 요시코 내 각시가 돼 줄래?” 각시 애기는 농담이었습니다. “물론이죠” “요시코 미안 마셔버렸어” “어머 장난치지 말아요. 술 취한척 하고” “아니야 내게는 자격이 없어. 각시가 되어 달라고 한 것도 단념하는 수밖에. 얼굴을 봐, 빨갛지? 정말로 마셨다니까” “그야 석양이 비치니까 그렇죠. 날 속이려 해도 안될걸요? 어제 약속했는데 마실 리가 없잖아요? 손 가락 걸고 약속한 걸요. 술을 마셨다니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렇게 해서 저희는 이윽고 결혼했고, 그로써 얻은 기쁨은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온 비애는 처참이라고 해도 모자랄 만큼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습니다. ..

명문과 단상 2022.08.12

3.인간 실격 - 세상에 대한 정의

세 번째 수기 호리키는 그날 도회지 사람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저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타산적인 약삭빠름입니다. "볼일이라니, 뭔데?" "이봐, 이봐. 방석 실을 끊지 말게." 호리키는 자기네 집 물건이라면 방석 실 하나도 아까운지 겸연쩍은 기색도 없이 그야말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저를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호리키는 지금까지 저하고 교제하면서 무엇 하나 잃은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제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것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

명문과 단상 2022.08.06

2.인간 실격 - 익살 없이 행복해지고 싶지만

두 번째 수기 "나도 그릴 거야. 도꺠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왠지 모르지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감추고 감추어 온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이 사기범의 아내(스네코)와 보낸 하룻밤은 저한테는 행복하고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하루밤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난 저는 원래대로 경박하고 가식적인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

명문과 단상 2022.08.05

1.인간 실격 - 익살로 세상을 살아간다

서문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 석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사나이의 유년 시절이라고나 해야 할까,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때의 사진인데, 굵은 줄무늬 바지 차림으로 여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정원 연못가에 서서 고개를 왼쪽으로 삼십 도쯤 갸우뚱 기울이고 보기 흉하게 웃고 있다. 통속적인 '귀염성' 같은 것이 그 아이의 웃는 얼굴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추에 대한 감식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언뜻 보기만 해도 몹시 기분 나쁘다는 듯이 "정말 섬뜩한 아이군". 하면서 송충이라도 털어내듯 그 사진을 내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두 번째 사진 속의 얼굴. 그건 또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

명문과 단상 2022.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