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과 단상

1.인간 실격 - 익살로 세상을 살아간다

수지 문지기 2022. 8. 5. 08:46

서문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 석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사나이의 유년 시절이라고나 해야 할까,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때의 사진인데, 굵은 줄무늬 바지 차림으로 여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정원 연못가에 서서 고개를 왼쪽으로 삼십 도쯤 갸우뚱 기울이고 보기 흉하게 웃고 있다. 통속적인 '귀염성' 같은 것이 그 아이의 웃는 얼굴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추에 대한 감식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언뜻 보기만 해도 몹시 기분 나쁘다는 듯이 "정말 섬뜩한 아이군". 하면서 송충이라도 털어내듯 그 사진을 내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두 번째 사진 속의 얼굴. 그건 또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소가 되어 있지만, 그래도 인간의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이다.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이 가장 기괴하다. 이번에는 웃고 있지 않다.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 뿐 아니라 인상조차 없었다. 특징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그 사진을 보고 나서 눈을 감았다고 치자. 나는 이미 그 얼굴을 잊어버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눈을 뜨고 사진을 다시 봐도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다. 마냥 역겹고 짜증 나고, 나도 모르게 눈길을 돌리고 싶어 진다.

첫 번째 수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 것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애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 때문에 저는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한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중략)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존재인 것입니다.


영원한 관계를 말하지만 실상은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을 원하는 거 아닐까?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가졌든 무엇을 느끼든, 단지 나의 갈증을 풀어줄 수 만 있다면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지. 술을 마시거나, 잠자리를 갖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 모두 본질은 똑같아. 내 만족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거지. 그러니까, 떨어져 있어도 무덤덤하게(사실은 더 효율적으로) 생활 할 수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