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과 단상

사람, 사물, 관념과 거리를 두는 것

수지 문지기 2022. 7. 17. 13:42

누군가 나를 부른다. 내가 필요하거나 내게 관심 있어서.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 표현하고 때문에 불러주는 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호명되는 순간 나는 한정된다. 아들 또는 오빠로서 역할이 주어지고 그 길을 가야 한다. 어쩌면 호칭은 사랑이 아니라 부르는 사람이 나를 마음것 쓰기 위한 족쇄 일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면 그건 너무 외롭다. 나는 족쇄를 싫어하면서도 원한다.

호명되지 않는 기쁨 (정다연)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나는 호명되지 않은 채 길을 걸어 아무도 지금 내가 어떤 모자를 쓰고 있는지, 내 머릿속에 어떤 구름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이름인지 알 수 없지 아무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서로를 멈춰 세우지 않고도 그대로 스쳐 지나갈 수 있어 섣불리 부를 수 없다는 거, 뒷 모습을 함부로 명명할 수 없다는 거, 버벅거리고, 실패한다는 거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조용히 어둠 속으로 돌아가는 밤이야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를 봐 무한히 확장된 설원, 가능성, 이런 말은 식상해 쓰이면서 가능성은 실현되고, 문은 끊임없이 열리고, 확장되지 나는 다만 백지를 바라봐 그게 원래 백지였던 것처럼 백지가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는 세계의 호출을 전부 멈추고 이름 없이 분류되지 않은 채 여기, 흘러가는 구름으로 머물고 있어 서류 더미에 새장에 누군가의 서랍속에 가두어놓을 수 없는 바람으로 있어 지금 너의 두 뺨을 가볍게 스치며


모든 건 결국 사라지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어른이란 거리 두는 걸 익힌 사람인지 모른다.

도쿄에 올라와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뿐이었다
(상실의 시대 - 제 2장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 살의 봄날 - 하루키)


어떤 사람이나 현상을 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것은, 그것이 내 마음속 두려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모호했던 공포가 형상화되어 눈앞에 드러나는 게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두려움은 거기 그대로 있다.

도서관은 노인들이나 가는 곳이고 산책 역시 노인들의 일과다. 내가 판단하기에 '노인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끝난사람-우치타테 마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