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4

크리스마스 10년 간의 기록

어느 크리스마스 날에.. 저는 어떤 모습일까요? 혼자일까요, 함께일까요. 쓸쓸할까요, 이제 평안에 닿았을까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앞날을 생각하기 전에 과거를 먼저 돌이켜봅니다. 사진첩을 꺼내 12월 24~25일에 촬영된 사진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10년간의 기록을 정리해 봤습니다. * 혼자 떠난 여행 - 4회 * 아무 기록 없음 - 3회 * 친구와 홈 파티 - 1회 * 글쓰기 - 1회 * 썸녀와 콘서트 - 1회 아.. 정말 무색무취한 날의 연속입니다. “여자 친구는 떠나고, 친구들은 바빴고, 저는 혼자 해외로 향했습니다”. 10번의 크리스마스가 한 문장으로 깔끔히 정리됩니다. 여행지에서는 어떤 모습이었나? 저를 촬영한 사진은 없지만 도로, 건물 사진을 보며 떠올려봅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

에세이 2022.12.23

마지막 순간에는 피하지 않을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18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의 마지막 출근길, 오래된 우리 집이 허물어지는 순간, 그리고 아끼던 사람과 작별할 때. 미래를 단정할 순 없지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처럼 마지막을 맞이할 것 같다. 사라지는 게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했을 테니, ‘음... 이제 끝이군’ 되뇌며, 남처럼 상황을 바라볼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거리 두는 법’을 익혔다. 일상을 나눴던 연인이 떠나고, 노력을 기울인 일들이 무의미해지는 경우를 겪으며, 결국 모든 건 사라진다. 남는 건 나 혼자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혼자라면 마음을 다할 필요 없지. 다만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게, 몇 번이고 그때를 먼저 상상하자. 하나가 끝나면 새로운 하나가 시작되고, 삶은..

에세이 2022.12.22

40대, 독거 아재, 오사카 여행기

모든 것이 예상대로 입니다. 저는 혼자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8km를 달립니다. 5시 30분에 일어나 빨지 못한 운동복을 다시 입고, 텐노지(天王寺) 공원을 네 바퀴 돕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 거지처럼 하고 뜁니다. 이곳의 큰 장점 중 하나지요. 대략 세 바퀴 즈음 돌다 보면 저는 제게 취합니다. 해외여행 중에도 자기 관리하는 남자라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셀카를 찍어 봅니다. 그리고 바로 지웁니다. 달리고 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습니다. 샤워하며 생각합니다. 남바로 갈까? 아니야 거긴 너무 분주하지, 엑스포 공원? 1시간이나 걸려, 오사카성? 경복궁하고 같을 듯. 어쩔 수 없이 틴더를 실행합니다. 좋군 좋아 이곳에 인연이 있을지 몰라. 신중히 좋아요를 눌러봅니다. 하지만 매칭이 되지 않네..

에세이 2022.12.13

나는 투수다, 던져야만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시시한 곳에서 살았다. 오래전 폐쇄된 방직공장이 흉물처럼 서있고, 그 주변을 낮고 허름한 집이 둘러싸고 있는 그런 동네였다. 방직공장이 한창인 시절에는 사람도 물건도 많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활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곳의 어른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눠졌다. 기회를 찾아 신도시로 향하는 사람들, 생업을 유지하며 재개발이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변화에 둔감했던 우리 집은 후자였고, 나는 친구들이 떠난 골목을 혼자 지키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동네에도 한 가지 자랑거리는 있었다. 바로 프로 야구장이다. 지역 야구팀(타이거즈)이 연속해서 우승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예의 바르게 응원하다 어느 순간 만취해 상대 팀을 야유하고 안전그물 위로 이물질을 던져댔는데..

에세이 2022.12.08

펼칠 수 없는 책, "뉘앙스"

벚꽃이 만개한 5월의 봄, 저는 덕수궁을 걷고 싶어 휴가를 냈습니다. 하지만 궁은 닫혀 있었고 돌담길에는 탄성을 지르며 꽃을 찍는 연인들만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싫어서 조용한 정동극장으로 이동한 후 커피를 사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평소 아끼던 책을 펼쳤는데, 순간 평화로움과 쓸쓸함,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분명 사람들의 소음은 싫었지만 이렇게 홀로 있는 걸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때는 책도 저를 위로할 수 없어서, 금세 일어나며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신님, 제게도 사랑을 주세요. 놀랍게도 신님은 제 기도에 응해주셨습니다. 우연히 나간 드로잉 모임에서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는데, 안정적인 삶이 지루해서, 창의적인 활동을 '한번' 경험하러 왔다고..

에세이 2022.11.30

홀로 떠나는 통영 버스 안에서

11월 11일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밤 11시 정각. 나는 통영으로 향한다. 벌써 세번째 방문. 똑같은 네 시간의 여행이 펼쳐질 것이다. 같은 길을 지나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골 마을에 도착. 그리고 첫 마을버스가 올 때까지 허름한 터미널을 서성이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6년 전 그리고 10년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창밖의 어둠이 흩어지길 기다릴 것이다. 출발 10분전. 편의점에 들러 차가운 생수와 뜨거운 캔 커피를 산다. 생수는 단지 목마름을 위한 예방약. 어지간해선 마시지 않는다. 손끝으로 뚜껑을 잡아 곧바로 가방에 넣은 후, 긴 여행에 온기를 줄 커피를 입에 담아 차에 오른다. 버스엔 사람이 가득하다. 가장 구석진 자리까지 둘러 앉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해댄다. 이상한 일이다..

에세이 2022.10.31

어린이날이 필요해요

"어린이날 까지만 살고 죽어야지." 나는 엄마가 사준 골덴바지에 누런 똥을 묻힌 채, 5층 옥상에서 바닥을 내려 보며 생각했다. 나는 서동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다. 2학년 9반 3번인데 이름은 말할 수 없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할 것 같으니 비밀로 해야겠다. 한 달 전인가, 상철이와 비석 치기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고려 속셈학원에 데려갔다. 무슨 속셈을 배우는 걸까? 사람을 속이는 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전문 학원까지 다니면 악당이 돼버리는거 아닐까? 무섭지만 왠지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원장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강아지, 고양이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며, 몇 개인지 맞혀보라고 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수를 세며 자신 있게 답했다. 벌써 2학년인 내게는 너무 쉬운 문제였다. 그런데 선생님과 ..

에세이 2022.10.19

나를 관조하다(4)

4. 추해지지는 않는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친한 친구에게 마저 본모습을 감추는 내가 우스웠다. 마포대교를 뛰어온 다리는 물에 젖은 듯 무겁고 피로해진 나는 벤치에 앉았다. 공원을 산책하던 가족 그리고 연인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 내며 내 앞을 가로질러갔다. 하지만 나와는 무관한 백색 소음에 불과했고 군중의 웅성거림 속에서 순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적막뿐이다. 산책하는 사람도 대교를 달리는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슬에 젖은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황급히 일어나 오피스텔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이곳에 온 이유도 잊어버린 채 외로운 감정이 사치였던 듯, 단지 추위를 피하기 위해 길고양이처럼 움직였다. 서강대교를 건너기 전 편의점에 들러 따..

에세이 2022.07.12

나를 관조하다(3)

3.거짓말쟁이 여의도 한강공원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I SEOUL U"라는 문구가 보인다. "나는 너를 서울 한다?". 처음 봤을 땐 감각 없는 공무원이 멋대로 만든 슬로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 볼수록 매력적이다. "SEOUL"이란 단어는 상황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데 누군가 박살내고 싶을 때는 Hate, 무시하고 싶을 때는 Ignore, 좋아할 때는 Like 등을 집어넣고 편한 대로 해석할 수 있다. 서울 사람의 혼재된 감정을 담는 그릇 같다고 할까. 오늘 내 마음에 들어온 "SEOUL"은 Miss 인 것 같다. 혼자서 휴직을 결정하고 이사하고, 또 홀로 걷는 나는 사람이 그립다. 괜한 생각을 해서 기분이 다운된다. 발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으면 이대로 축 쳐질 것 같다. 하지만 ..

에세이 2022.06.27

나를 관조하다(2)

1. 자기부정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쉼 없는 노력에도 왜 이상은 멀어지기만 할까?" 해답을 찾아야 한다. 다만, 과거와는 다른 파격적인 결정을 해야 할 것 같다. 합리적으로 행동한 결과가 지금의 모습 이므로 변해야만 했다. 휴직을 했다. 업무가 한창인 7월에 휴직원을 제출하고 회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특별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가장 먼저 마포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보증금 3천에 월세 80만 원 8평 작은 방 1개. 다시 빈털터리 사회 초년생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한강을 걸어보고 싶었다. 이사 첫날, 잠자는데 필요한 이불과 베개만 구매한 후 밤 9시 즈음 집을 나와 한강으로 향했다. 매번 시간에 쫓겨 봤던 야경을 천천히 눈에 담고 싶었다. 2. 이상과 ..

에세이 2022.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