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4

나를 관조하다(1)

0. 조연의 꿈 특별한 삶을 원한 건 아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연이 되고 싶었다. 극적인 반전도 배신도 없는 예측 가능한 일상을 살며 세상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싶었다. 그러다 누군가 나를 발견하면 사랑에 빠져 평범한 가족을 이루는 거지. 아이는 딱 1명. 한강을 15분 내로 걸을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사서 매달 150만 원의 이자를 내고, 보행기에 아이를 태워 유유히 한강을 거니는 모습. 나의 이상향이다. 시작은 괜찮았다. 나는 한 번의 실패 없이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고 거의 나간 적 없는 학교에서도 본받을 선배라고 치켜세웠다. 예쁜 여자 친구도 있었다. 과 동기들이 공무원 학원 다닐 때 그 애와 놀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힘없이 학원에 끌려가는 친구들을 보며 우..

에세이 2022.06.13

안부인사, 봄날 광화문에서

날씨가 좋아 휴가를 내고 광화문에 왔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일하는 건 삶의 낭비 같아서요. 덕수궁을 걷고 싶었는데 휴관이어서 그 옆 돌담길로 향했답니다. 직장인 그리고 연인들이 나와서 벚꽃을 찍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웠죠. 하지만 나는 그 길을 빠르게 지나쳐 정동극장에 도착했습니다. 가운데 텅 빈 공간이 있고 사람들은 가장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녹아들고 싶어 아메리카노와 갈릭 브레드를 사서 나무 그늘이 있는 벤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여유로웠습니다. 서울에 나만의 아지트를 발견한 것 같아 기뻤고 함께 올 누군가를 떠올리면 설레었습니다. 그러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불확실한 사람을 기다리고 상상하는 제가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좋은 날, 슬픔이 커지는 건 싫어 당장 할 수 ..

에세이 2022.04.04

아버지는 수북이 쌓인 모래를 삽으로 퍼 모래채에 던졌다. 먼지는 사방으로 흩날리고 나는 콜록이며 옆에 앉아 채를 통과한 모래가 밀가루처럼 부드럽다 생각했다. 우리 집을 짓는 중이었다. 희미하게 그어진 집터와 비포장 도로 밖에 없는 곳에서 모래를 갈고 벽돌을 쌓았다. 계획 단지로 조성된 동네 곳곳도 공사 중이었다. 집이 생기는 건 좋았지만 지역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 시내에 갈 수 있고 가장 높은 건물은 5층 아파트가 전부였다. 촌놈이 된 기분이었다. 왜, 시내에는 집을 못 짓는 걸까? 촌티 나는 애들과 학교를 다녀야 하나? 등을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이사하던 날 어깨에 힘 들어간 부모님과는 다르게, 친구에게 주말마다 오겠다 말한 후 무덤덤하게 떠났다. 사실 좀 더 행복했어야..

에세이 2022.03.28

일상 속 내 마음

-아침에는 평안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몽롱한 정신이 밝아져 평범한 내가 되어갈 때 좀 더 여유롭고 싶다. 물을 끓여 도라지 차를 내린다. 한 모금은 입을 헹구고, 두세 번째 모금은 마시고, 나머지는 모두 버린다. “버려진 것”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몸속에서 따듯하게 섞이지 못하고, 차가운 철 위에 혼자 식어가니까. 1~2초 정도 불편한 감정이 지나간다. 하지만 내 몸에 온기가 퍼지면 “그것”은 금세 잊혀 버린다. 여유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으니까. -너를 볼 때면 그녀에게 다가서고 싶은 마음과 체통을 지키라는 마음이 충돌한다. 일상 대화를 하며 그 사람을 알고 싶을 뿐인데, 이 세상에는 제약이 너무 많다. “아니다”, 단지 대화만 원했으면 이렇게 부담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무거운 건, 그를..

에세이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