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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잊혀지는 과정.. (기억을 버리는 법 -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 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 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 자주 소멸을 꿈꾸며 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 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 고요한 어둠속에서 점차 생각조차 희박해지고 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 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명문과 단상 2023.10.29

그래서 -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

명문과 단상 2023.10.29

깨진 약속을 지키고 있는 너 (이렇게 추운 날에-신해욱)

이렇게 추운 날에. 열쇠가 맞지 않는다. 이렇게 추운 날에.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뭘까. 이 어리석음은 뭘까. 얼음일까. 얼음의 마음일까. 막연히 문을 당기자 어깨가 빠지고 뼈가 쏟아지고 쏟아진 뼈들이 춤을 출 수 없게 하소서 경건한 노래가 굴러떨어지고 뼈만 남은 이야기에 언젠가 눈이 내리는데 깨진 약속들이 맹목적으로 반짝이게 되는데 일관성을 잃은 믿음과 열쇠와 열쇠 구멍과 이렇게 추운 날에. 너는 있다. 여전히 있다. 터무니없이 약속을 지키고 있다. 아주 다른 것이 되어 이렇게 추운 날에 모든 밤의 바깥에서

명문과 단상 2023.10.29

살아 있다고 말하려고..(소동-안희연)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

명문과 단상 2023.10.10

돌아와도 돌아오지 못한다면(임경섭-비행운)

꿈을 꾸었어요 네모반듯한 교정 한구석에 늘어선 양버즘나무들이 천천히 그늘을 움직이고 양버즘나무 그늘의 중심에 숨은 매미 떼가 쉬지 않고 울어대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가득 거대한 여객기들이 유유히 줄지어 돌아오는 꿈이었어요 너무나 거대했던 나머지 하늘은 보이지 않고 여객기들과 그것들이 남긴 비행운만 섬섬이 빛나는 그럼 꿈이었어요 그들의 활주로가 어느 쪽으로 놓여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낮고 느린 비행이 우리에게 잇따른 안착을 꿈꾸게 하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운동장에 늘어선 우리는 입을 벌린 채 탄성을 내지르며 공중을 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여객기의 좁은 창문들 새로 얼핏 보일 것 같은 여행자들의 벅찬 마음을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때였어요 대열의 끝에서 여객기 하나가 항로를 벗어난 것은 한껏 바람을 불어..

명문과 단상 202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