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22

오늘 하루도 위선자가 되어

위선이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선생님을 속이고 지금은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사랑받는 것, 구체적으로 말해 사람들이 제게 주는 관심은 삶의 이유였습니다.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고 거리에서 주운 돈을 경찰서에 돌려주며 다리 다친 친구 가방을 들어줬던 것 모두 관심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에게 멋쩍게 웃으며 별일 아니라고 말했지만 귀는 항상 그들의 대화를 쫓았습니다. 아! 당신의 혀 위에서 저를 끝없이 씹어주세요 따위의 저질스러운 생각이 가득했고 배려 없는 에티켓을 익혔고 또 무언가 착한 척을 하였습니다. 사랑에 중독된 저는 충실한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며 상대가 원하는 이야기를 쏟아 내고 이를 위해 다양한 것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정독해서 여름 성경학..

편린 2022.07.20

22년5월11일(수) - 혼자 있는 밤

밤이 오면 그녀는 일찍 잠들어 긴 시간을 혼자 보냅니다 오늘은 짧게라도 통화하고 싶었습니다 일상적인 이야기, 점심에 먹은 음식 퇴근 후 한 운동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을 묻고 싶었습니다 10분 정도 대화하고 '아.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구나' 느끼며 밤을 마주하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듭니다 외롭습니다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 닿을 곳이 없어 쓸쓸합니다 목소리를 나눠줬다면 내 마음을 그 위에 올렸을 텐데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만 잡니다

편린 2022.05.11

대물림

아이는 출생이 불분명했다. 2살~3살 즈음 그의 아버지가 집으로 데려왔다. 고아원에서 입양한 것인지, 씨받이 친모가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는 교육받지 못했고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재혼하기 전 낳은 중학생 아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다. 아이는 사랑받지 못했다. 아이 집에 가면 부모의 욕설과 폭언을 항상 들을 수 있었다. 소풍 도시락도 싸주지 않았고, 운동회나 참관수업에도 부모는 오지 않았다. 그들은 말했다 "아이 학자금을 준비하려면 부부가 함께 일할 수밖에 없다"라고. 아이는 정신적으로는 불안하고 육체적으로는 왜소하게 성장했다. 아이는 군 제대 직후 결혼했다. 급작스런 임신으로 인한 결혼이었지만 독립된 가정을 꾸리는 게 그 아이에게는..

편린 2022.04.13

새벽과 아침 사이에서

3시 30분에 깼다. 정식으로 잠든 적이 없는데 졸았나 보다. 저녁 대신 라면과 만두 그리고 딸기를 먹었고 그 후는 생각나지 않는다. 애매하다. 생각도 몽롱하고 시간은 새벽과 아침에 걸쳐있다. 5시만 되었어도 뛰러 나갈 텐데 지금 달리는 건 미친 짓 같아 방에 있는다. 넷플릭스를 켜고 오래된 애니메이션 시티헌터를 보았다. 그 만화를 처음 본 게 20년 전인데 주인공은 여전히 21살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부러운 놈이다. 나이도 그대로고 주변에는 미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꺼버렸다. 뭘 해야 하나? 거실로 나가니 김이나의 작사법이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젖힌 채 검은 물방울 반점이 있는 흰색 셔츠를 입고, 그보다 빛나는 피부를 가진 작가 사진이 보였다. 40대라고 하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32..

편린 2022.03.06

* 그녀의 독백이 나를 받아주네

사랑하는 아부지... 아마도 나는.. 언젠가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곳에 작은 내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 말릴 마당이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고..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운이 좋으면 내 이름의 책.. 전혀 안팔리는 책이어도 좋은.. 그 책이 서점 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그게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 걸까요.. 아부지 ... 어쩌면 나는.. 아부지한테 언젠가 이 말을 하게 되는 일이... 사는 내내..가장 두려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아부지 나는..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되지 못한 그 긴..

편린 2022.03.02

도네츠크에는 폭격이, 한강에는 아름다움이

폭격이 들린다고 합니다. 가까운 곳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벌써 수년 째 지속된 교전에 익숙해진 그녀 입니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 살고 있는 그녀는 우크라이나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아닌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괴뢰국가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을 좋아하고 제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뉴스에서는 끝없이 "침략, 사망자, 폭격" 등이 나오고 저는 아름다운 한강을 달리고 있습니다. 주위에는 웃고 사진 찍는 행복한 크루들 뿐인데 친구는 불을 끄고 어두운 침대에 누워 가끔 메시지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본인이 살아 있는 걸 알리고 싶어서요. 저는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쁜..

편린 2022.02.28

당신 아름답게 피지 마세요

꽃 같은 당신 활짝 피지 않고 봉우리 져 있어요 남들은 볼 수 없게 곁에 있는 저만 알 수 있게 아름다움을 가려 주세요 기어코 피어야 겠다면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이 되어주세요 향기도 색도 없는 조화처럼만 있어주세요 당신 결국 피었군요 누구보다 붉은 장미로 태양과 함께 웃고 있네요 저기 벌들이 오네요 아주 많은 벌때가 다가옵니다 이제 꽃잎은 필요 없네요 저는 떨어집니다 그리고 사라집니다 안녕

편린 202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