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추해지지는 않는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친한 친구에게 마저 본모습을 감추는 내가 우스웠다. 마포대교를 뛰어온 다리는 물에 젖은 듯 무겁고 피로해진 나는 벤치에 앉았다. 공원을 산책하던 가족 그리고 연인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 내며 내 앞을 가로질러갔다. 하지만 나와는 무관한 백색 소음에 불과했고 군중의 웅성거림 속에서 순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적막뿐이다. 산책하는 사람도 대교를 달리는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슬에 젖은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황급히 일어나 오피스텔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이곳에 온 이유도 잊어버린 채 외로운 감정이 사치였던 듯, 단지 추위를 피하기 위해 길고양이처럼 움직였다. 서강대교를 건너기 전 편의점에 들러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샀다. 신맛이 가득한 1,500원짜리 싸구려 커피. 하지만 몸을 녹이는 데는 충분했다. 두 모금을 연달아 마신 후 온기 가득한 컵을 목에 댄 체 다리 위에 올랐다.
다리를 절반 정도 건넜을 때 가로등이 꺼졌다. 15분 후 해가 떠올랐고 햇살에 비친 건물 유리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밤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단아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다만 63 빌딩만은 금빛 유리가 타오를 듯 이글거렸고, 그 모습이 마치 이곳의 주인공은 자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너의 시간인 거니?"
어린 시절 63 빌딩 사진이 있는 포스터를 산적이 있다. 헬기에서 촬영한 건물 야경과 한강에서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을 세트로 판매한 제품이었는데, 나는 포스터를 방에 걸어두고 63 빌딩과 한강 그리고 그곳을 거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 방학을 맞아 가끔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오면, 용산역에 도착하기 전 산보다 높이 솟은 그를 보며 대도시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곤 했다.
어쩌면 그는 이미 힘을 잃고 겨우 서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키가 크지도 않고 특색이었던 황금색 치장도 이제 촌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경외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 지금도 여의도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생각해봤다. 누군가 나를 한 번이라도 마음 깊이 품어본 적이 있을까라고.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계속해서 그 사람 속에서 되살아나고 그때마다 나도 모르는 행복에 젖을 것 같다. 그러면 더 이상 외롭지 않겠지. 만일 결국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다면,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추해지기는 싫으니까.
어느새 대교는 차로 가득하다. 먼지와 분진이 다시 나를 따라왔고 나는 차가워진 커피를 강에 던진 후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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