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를 관조하다(3)

수지 문지기 2022. 6. 27. 20:20

3.거짓말쟁이

여의도 한강공원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I SEOUL U"라는 문구가 보인다. "나는 너를 서울 한다?". 처음 봤을 땐 감각 없는 공무원이 멋대로 만든 슬로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 볼수록 매력적이다. "SEOUL"이란 단어는 상황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데 누군가 박살내고 싶을 때는 Hate, 무시하고 싶을 때는 Ignore, 좋아할 때는 Like 등을 집어넣고 편한 대로 해석할 수 있다. 서울 사람의 혼재된 감정을 담는 그릇 같다고 할까. 오늘 내 마음에 들어온 "SEOUL"은 Miss 인 것 같다. 혼자서 휴직을 결정하고 이사하고, 또 홀로 걷는 나는 사람이 그립다.

괜한 생각을 해서 기분이 다운된다. 발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으면 이대로 축 쳐질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서울로 전입신고한 첫날이고 한강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이럴 순 없지. 마음을 풀어줄 사람을 찾아 전화를 건다. 내가 지금 회사(대기업이라고 자랑하던)에 입사했을 때 힘겹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학과 동기가 전화를 받는다.

"진뜩아 오랜만이다, 무슨일이냐~아?"
"광주에 내려 왔냐~아?"

이제는 어엿한 공무원(광주광역시, 7급)이 된 친구는 말꼬리를 늘리는 특유의 톤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친구와 이야기하면 과거로 회귀한 느낌이 든다. 오래된 별명을 부르고 평소 쓰지 않던 사투리를 사용하면 한때 잘 나갔던 시절이 떠올라 기분이 밝아진다.

"아니, 나 한강 여의도 공원이야. 63 빌딩 옆에 있고 가끔 뉴스에도 나오는데. 알아?"
"63 빌딩은 알아도 근처 공원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밤늦게 뭐하냐~아? 집에 안 가고?"

오피스텔이 없었다면 느닷없는 현실 자각 후, 어떻게 경기도로 가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서울시민. 이런 멋진 곳을 천천히 즐길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고.

"나?.. 아 너 몰랐지. 나 서울에 집 샀어"
거짓말을 했다. 근 20년간 잘 누르고 있던 허언증이 튀어나왔다. 그 애는 이곳을 모르니까 거짓말을 해도 알아 채지 못할 것이다. 딱히 피해 주는 것도 없는 데 성공한 사람으로 보여지면 좀 어때. 나중에 서울 아파트를 분양받을지도 모르고..

"한신 아파트라고 엄청 오래된 집이야. 20평이라 방도 작고, 샤워하려면 녹물을 먼저 빼내야 한다니까."
시야에 들어온 아파트 이름을 급하게 가져왔다. 뉴스에서 봤던 재건축 아파트 단점도 이야기하고, 이러다 빌린 적도 없는 대출금액과 상환 이자까지 생각날 것 같았다. 자중하자. 정신승리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서울 아파트면 아무리 싸도 10억은 훨씬 넘을 텐데. 한강 근처면 얼마나 하는거야~아? 여기 하고는 완전 비교 불가겠다."
"근처에서 일하니까 산 거지 뭐 특별한 게 있겠어. 그보다 너처럼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게 잘하는 거야. 안정감도 생기고 챙겨주는 사람도 있잖아."
"글쎄... 챙겨주는 느낌은 별로 없는데? ㅎ 아이 크는 거 보면 신기하지만, 내 시간도 거의 없고 항상 쪼들려 살아. 공무원 월급 알자나. 그나마 지방이니까 버티는 거지."
"그래도 고향이 좋은 거야. 와이프 복직하면 괜찮아질 거야. 힘내"

 

내가 위로받으려 한 전화인데 잘 살고 있는 친구를 복 돋아주고 있다. 친구야, 사실 나는 거짓말쟁이에 외톨이야. 서울 집도 애인도 주변에 대화 나눌 사람도 없어. 너와 이야기하면 좋았던 과거가 생각나고 유치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어 연락했어. 미안해.

"나중에 서울 가면 들를게. 집 한번 보여줘"
"응. 연락 줘. 청소하고 기다릴게 ㅎ"

그때는 또 어떤 거짓말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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