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를 관조하다(1)

수지 문지기 2022. 6. 13. 21:21

0. 조연의 꿈

특별한 삶을 원한 건 아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연이 되고 싶었다. 극적인 반전도 배신도 없는 예측 가능한 일상을 살며 세상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싶었다. 그러다 누군가 나를 발견하면 사랑에 빠져 평범한 가족을 이루는 거지. 아이는 딱 1명. 한강을 15분 내로 걸을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사서 매달 150만 원의 이자를 내고, 보행기에 아이를 태워 유유히 한강을 거니는 모습. 나의 이상향이다.

시작은 괜찮았다. 나는 한 번의 실패 없이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고 거의 나간 적 없는 학교에서도 본받을 선배라고 치켜세웠다. 예쁜 여자 친구도 있었다. 과 동기들이 공무원 학원 다닐 때 그 애와 놀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힘없이 학원에 끌려가는 친구들을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우리에겐 데이트 루틴이 있었다. 식사하고 호수를 한 바퀴 돈 뒤 베스킨라빈스에서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다. 그리고 DVD 방에서 섹스를 한다. 옷을 입은 채 조심스럽게 여러 번 한다. 어두운 방을 빠져나오면 몸 구석 민트향이 가득했고 우린 간격을 두고 걸었다. 좋은 날이었다.

입사한 회사에는 똑똑하고 센스 있는 동기들이 많았다. 회의록 작성, 프레젠테이션, 술 마시기 등 행동 하나하나를 비교당했다. 더듬거리며 세미나를 진행할 때 성격까지 좋은 동기 녀석이 발표를 도와주었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욕먹는 것보다 더한 열패감을 느꼈고 새로워지고 싶었다. 리모컨으로 프로젝터를 끄며 생각했다. 이곳을 떠난다면, 아무도 모른 곳으로 간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GMAT 공부를 시작했다. Word Smart 영어 단어를 외우고 중학교 3학년 수준의 수학 문제를 풀었다. 당시 유행했던 MBA 열풍에 동참했다. 중국이 세계 최강 국가가 된다는 다큐를 보고 북경대, 칭화대, 푸단대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점심에는 기초 중국어를 배우고 시간을 내어 상해에도 다녀왔다. 스타일은 애매했지만 다리가 길고 예쁜 여자들이 많았다. 한류로 인해 내게 친절했고 먼저 다가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환영은 처음 이었다. “상해” 이곳은 내게 신천지(新天地)가 될 것 같았다. 무교동에 있는 피어슨 센터를 예약하고 연차를 썼다.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고 시험 중간에 먹을 초코바를 구매했다. 시험 준비가 끝났다.

아버지가 쓰러졌다.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고 나는 수험생에서 보호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성인용 기저귀 채우는 법을 익혔다. 본래 비틀어진 허리 때문에 갈아 끼는게 갑절로 힘들었다. 그가 두 번의 수술을 끝내고 휠체어에 앉혀 집에 왔을 때 추억을 남겨야겠다 생각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리조트를 예약하고 대형 봉고차를 빌렸다. 맨 뒷 좌석에 이불을 깔고 그를 눕혔다. 숙소로 향하는 길 그는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켜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혼자 말을 했다. "여기는 계란 장사할 때 왔던 곳인데", "저 산에 매실나무를 심어 팔았는데" 등을 중얼거리며 버틸 수 있을 만큼 앉아 있었다. 그에게는 생소한 리조트보다 젊은 시절 기억이 더 소중했던 것 같다.

그는 결국 사라졌다. 나를 떠난 다른 사람들처럼 남은 흔적도 지워질 것이다.
생각해본다. "한때 소중하게 다뤘던 연인, 나의 노력 그리고 가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고.

만일,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

나는 한강에서 차로 1시간 걸리는 곳에 혼자 살며

착실히 이상향에서 멀어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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