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다들 흐린 하늘에 짓눌리기라도 했나 싶을 만큼 하나같이 키가 작았다. 그리고 그 마을 변두리의 음산한 풍경을 닮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며 한꺼번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애처로운 목을 한껏 젖히며 뭔지 모를 고함소리를 열심히 질러댔다. 그런데 그때였다.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그 여자아이가 부르튼 손을 불쑥 내밀어 힘껏 좌우로 흔드는가 싶더니, 순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따스한 햇빛 색으로 물든 귤이 대여섯 개쯤, 기차를 배웅하는 아이들 위로 후두두둑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아이, 아마도 이제부터 남의 집살이를 하러 가는 그 여자아이는 품속에 넣어 둔 몇 개의 귤을 창밖으로 던져, 일부러 건널목까지 배웅 나온 남동생들의 고마움에 보답한 것이다.
어스름이 깔린 마을 변두리의 건널목과, 작은 새처럼 함성을 지르던 세 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 위로 어지러이 떨어지는 선명한 귤들의 색, 그 모든 것이 차장 밖에서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애처로울 만큼 또렷이 그 광경이 새겨졌다. 그리고 거기서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랑한 기분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가슴이 벅차 고개를 들고 마치 딴사람을 보듯이 그 여자아이를 지켜보았다. 그 아이는 어느새 다시 내 앞자리로 돌아와 온통 튼 뺨을 연두색 털실 목도리에 또다시 파묻은 채, 큼직한 보따리를 껴안은 손에는 삼등칸 열차표를 꼬옥 쥐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뭐라 말할 수 없는 피로와 권태를 그리고 불가해하고 하등하며 지루한 인생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1919년)
'사랑'이라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게,
공허한 말 대신
가슴에 닿는 작은 행동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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