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8

나는 투수다, 던져야만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시시한 곳에서 살았다. 오래전 폐쇄된 방직공장이 흉물처럼 서있고, 그 주변을 낮고 허름한 집이 둘러싸고 있는 그런 동네였다. 방직공장이 한창인 시절에는 사람도 물건도 많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활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곳의 어른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눠졌다. 기회를 찾아 신도시로 향하는 사람들, 생업을 유지하며 재개발이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변화에 둔감했던 우리 집은 후자였고, 나는 친구들이 떠난 골목을 혼자 지키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동네에도 한 가지 자랑거리는 있었다. 바로 프로 야구장이다. 지역 야구팀(타이거즈)이 연속해서 우승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예의 바르게 응원하다 어느 순간 만취해 상대 팀을 야유하고 안전그물 위로 이물질을 던져댔는데..

에세이 2022.12.08

펼칠 수 없는 책, "뉘앙스"

벚꽃이 만개한 5월의 봄, 저는 덕수궁을 걷고 싶어 휴가를 냈습니다. 하지만 궁은 닫혀 있었고 돌담길에는 탄성을 지르며 꽃을 찍는 연인들만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싫어서 조용한 정동극장으로 이동한 후 커피를 사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평소 아끼던 책을 펼쳤는데, 순간 평화로움과 쓸쓸함,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분명 사람들의 소음은 싫었지만 이렇게 홀로 있는 걸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때는 책도 저를 위로할 수 없어서, 금세 일어나며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신님, 제게도 사랑을 주세요. 놀랍게도 신님은 제 기도에 응해주셨습니다. 우연히 나간 드로잉 모임에서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는데, 안정적인 삶이 지루해서, 창의적인 활동을 '한번' 경험하러 왔다고..

에세이 2022.11.30

인간, 다자이 내 마음의 문장들

어른이란 외로운 사람이다. 서로 사랑하고 있어도 조심하면서 남남처럼 서먹서먹하게 대해야 한다. 어째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보기 좋게 배신을 당해 큰 창피를 겪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이 발견은 청년이 어른으로 옮겨가는 첫 번째 과정이다. 어른이란 배반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쓰가루) '인간은 왜 서로를 평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이런 소박한 의문에 대해 느긋하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한다. '모래밭의 싸리꽃도, 기어가는 작은 게도, 강가에 쉬는 기러기도, 그 무엇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을 서로 존경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

명문과 단상 2022.11.21

정신 패배(?)의 날

어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글이 좋아지고, 어떤 사람은 아예 쓰지 않게 된다. 한 번도 감탄해본 적 없는 사람의 글. 언제나 감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던 글이, 오늘은 좋았다. 사랑을 한다고 하더니 과연, '사랑'이란 단어가 하나도 없는데 그 모습을 느끼게 만든다. 본래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나? 나는 누군가에 빠지면, 평소 쓰던 단어도 생각나지 않고 한 문장도 적을 수 없는데. 손에 쥔 행복이 사라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다, 아 이제 사랑이 떠나는군 느낌이 오면, 연애편지 비슷한 것을 적어 보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시간이 흐른 뒤 감정을 하나씩 떠올리며 글로 옮기는데, 이 사람은 사랑을 하며 글이 함께 밝아지고 있다. 마음이 온전히 하나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혼자 패배감에 젖었다.

편린 2022.11.12

자아는 스스로를 구속한다 (인생독본)

자신에 대해 걱정할수록, 자신에게 얽매일수록, 자신의 삶을 아낄수록 인간은 약해지고 자유에서 멀어진다. 반대로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할수록, 덜 얽매일수록, 덜 아낄수록 인간은 강해지고 자유로워진다. (톨스토이) 만약 자기 존재와 자기 의지를 부정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쉽고 좋아질 것이다. (톨스토이) 잠시나마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아보려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절대적인 자기부정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를 평가할 수도, 그런 삶을 비판할 권리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총명하고 정직한 인간이라면 자기를 잊고 부정하는 우연한 순간이 정신과 육체에 얼마나 귀중한 영향을 끼치는지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러스킨) 자아라는 갇힌 방을 나와 세상과 부딪히고 섞이라는 말 같다. 절대정신으로 일체화. 하지만 잘못되..

명문과 단상 2022.11.11

무지의 두 가지 종류 (톨스토이 - 인생독본)

지식은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 아주 많은 것을 알아도 가장 필요한 것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무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순수하고 자연적인 무지로 인간은 이런 무지의 상태에서 태어난다. 다른 하나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무지다. 그들은 온갖 학문을 배우고, 사람들이 알았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게 되어도, 신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기에는 보잘것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소위 많이 배운 사람들도 실제로는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저런 학문을 찔끔찔끔 겉핥기식으로 접하고 교만해진 천박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교만해 경솔한 판단을 내리고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른다. 또한 사람들을 현혹시켜 간혹 존경을..

명문과 단상 2022.11.10

삶과 죽음은 두 개의 경계선이다 (톨스토이-인생독본)

죽은 뒤 영혼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한다면, 태어나기 전의 영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네가 어딘가로 간다면,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온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네가 이 삶으로 왔다면, 분명 어딘가에서 온 것이다. 만약 죽은 뒤에도 살게 된다면 그전에도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죽은 뒤 어디로 갈까?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왔던 곳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거기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거기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죽은 뒤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죽음 뒤에도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본래 있던 자리로 간다는 의미겠지.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

명문과 단상 2022.11.09

홀로 떠나는 통영 버스 안에서

11월 11일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밤 11시 정각. 나는 통영으로 향한다. 벌써 세번째 방문. 똑같은 네 시간의 여행이 펼쳐질 것이다. 같은 길을 지나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골 마을에 도착. 그리고 첫 마을버스가 올 때까지 허름한 터미널을 서성이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6년 전 그리고 10년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창밖의 어둠이 흩어지길 기다릴 것이다. 출발 10분전. 편의점에 들러 차가운 생수와 뜨거운 캔 커피를 산다. 생수는 단지 목마름을 위한 예방약. 어지간해선 마시지 않는다. 손끝으로 뚜껑을 잡아 곧바로 가방에 넣은 후, 긴 여행에 온기를 줄 커피를 입에 담아 차에 오른다. 버스엔 사람이 가득하다. 가장 구석진 자리까지 둘러 앉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해댄다. 이상한 일이다..

에세이 2022.10.31

추천 편지, 아버지에게

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드디어 이사를 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혼자 계셨는데, 이제 마음이 바뀌셨는지 함께 산다고 하십니다. 늘 그렇듯 할머니는 소리 높여 찬송가를 트시는데 할아버지가 잘 버티실지 걱정입니다. 이사 날에는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깔끔하게 준비된 할머니 옆방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날은 예보에 없던 가을비가 내려 손은 차고 물에 젖은 발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이상하지요. 왜 이사 날에는 항상 비가 오는지. 아버지 오늘은 가을이 끝나는 날 상강(霜降)입니다. 저는 어제처럼 얇은 가디건을 입고 밖을 나왔는데, 새벽 공기에 몸이 떨리며 문득 아버지의 이사 날이 떠올랐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던 이슬비, 잔디 위에 고인 투명한 물방울, 그리고 사람들이 담배처럼 ..

편린 202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