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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수북이 쌓인 모래를 삽으로 퍼 모래채에 던졌다. 먼지는 사방으로 흩날리고 나는 콜록이며 옆에 앉아 채를 통과한 모래가 밀가루처럼 부드럽다 생각했다. 우리 집을 짓는 중이었다. 희미하게 그어진 집터와 비포장 도로 밖에 없는 곳에서 모래를 갈고 벽돌을 쌓았다. 계획 단지로 조성된 동네 곳곳도 공사 중이었다. 집이 생기는 건 좋았지만 지역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 시내에 갈 수 있고 가장 높은 건물은 5층 아파트가 전부였다. 촌놈이 된 기분이었다. 왜, 시내에는 집을 못 짓는 걸까? 촌티 나는 애들과 학교를 다녀야 하나? 등을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이사하던 날 어깨에 힘 들어간 부모님과는 다르게, 친구에게 주말마다 오겠다 말한 후 무덤덤하게 떠났다. 사실 좀 더 행복했어야..

에세이 2022.03.28

봄에는 새로운 즐거움 찾을 거에요

좋아하는 걸 글로 쓰는 숙제를 받았어요 한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요 달리면서 되뇌고 노트에 끄적여봐도 공백뿐이에요 시간을 되돌려 봤어요 클라우드에 기록된 사진을 스크롤 해봤어요 1년 3년 그리고 7년 지금과는 다르게 미소 짓고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한 제가 보여요 옆에는 더한 그대가 있고요 깨달았어요 그때도 딱히 좋아하는 건 없었다는 걸 단지 당신이 저를 감싸주었고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다는 걸 이제 당신은 멀리 있어요 비행기를 타도 닿을 수 없죠 거리만큼 나는 아득해져요 그쪽이 지워졌으면 좋겠어요 누가 나를 잘게 쪼개 기억과 함께 던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또다시 봄이에요 온기 퍼지는 이 봄 내게도 오늘의 즐거움이 필요해요 떨어지는 벚꽃 나무 밑에 서볼까요 그곳에선 혼자 있어도 꽃이 저를 받..

2022.03.23

새벽과 아침 사이에서

3시 30분에 깼다. 정식으로 잠든 적이 없는데 졸았나 보다. 저녁 대신 라면과 만두 그리고 딸기를 먹었고 그 후는 생각나지 않는다. 애매하다. 생각도 몽롱하고 시간은 새벽과 아침에 걸쳐있다. 5시만 되었어도 뛰러 나갈 텐데 지금 달리는 건 미친 짓 같아 방에 있는다. 넷플릭스를 켜고 오래된 애니메이션 시티헌터를 보았다. 그 만화를 처음 본 게 20년 전인데 주인공은 여전히 21살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부러운 놈이다. 나이도 그대로고 주변에는 미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꺼버렸다. 뭘 해야 하나? 거실로 나가니 김이나의 작사법이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젖힌 채 검은 물방울 반점이 있는 흰색 셔츠를 입고, 그보다 빛나는 피부를 가진 작가 사진이 보였다. 40대라고 하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32..

편린 2022.03.06

* 그녀의 독백이 나를 받아주네

사랑하는 아부지... 아마도 나는.. 언젠가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곳에 작은 내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 말릴 마당이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고..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운이 좋으면 내 이름의 책.. 전혀 안팔리는 책이어도 좋은.. 그 책이 서점 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그게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 걸까요.. 아부지 ... 어쩌면 나는.. 아부지한테 언젠가 이 말을 하게 되는 일이... 사는 내내..가장 두려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아부지 나는..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되지 못한 그 긴..

편린 2022.03.02

도네츠크에는 폭격이, 한강에는 아름다움이

폭격이 들린다고 합니다. 가까운 곳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벌써 수년 째 지속된 교전에 익숙해진 그녀 입니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 살고 있는 그녀는 우크라이나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아닌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괴뢰국가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을 좋아하고 제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뉴스에서는 끝없이 "침략, 사망자, 폭격" 등이 나오고 저는 아름다운 한강을 달리고 있습니다. 주위에는 웃고 사진 찍는 행복한 크루들 뿐인데 친구는 불을 끄고 어두운 침대에 누워 가끔 메시지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본인이 살아 있는 걸 알리고 싶어서요. 저는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쁜..

편린 2022.02.28

*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너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죽인다 무표정하게 앞에 앉아 다른 남자와 카톡을 하고 말도 없이 술집을 나가 전자담배를 빨아댄다 다만 너는 아름답기 때문에 나는 피지 않는 담배를 빌려 너와 함께 빨아댄다 니코틴 때문인가 5월 밤의 기분 좋은 선선함 때문인가 너는 기습적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고 오빠라고 나를 부른다 나는 수많은 오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름답기 때문에 그리고 내 품에 있기 때문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나를 죽이고 간다 카톡에서도 가상공간에서도 사라져 닿지 않는다 이런 엔딩을 예감했다 우린 결이 달라 처음부터 오래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쫓기면서도 빛을 내는 반딧불이처럼 아름다움을 쫓는 것은 나의 본성이기에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너무 아름다웠다. * 나태주 시 제목 ..

2022.02.16

당신 아름답게 피지 마세요

꽃 같은 당신 활짝 피지 않고 봉우리 져 있어요 남들은 볼 수 없게 곁에 있는 저만 알 수 있게 아름다움을 가려 주세요 기어코 피어야 겠다면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이 되어주세요 향기도 색도 없는 조화처럼만 있어주세요 당신 결국 피었군요 누구보다 붉은 장미로 태양과 함께 웃고 있네요 저기 벌들이 오네요 아주 많은 벌때가 다가옵니다 이제 꽃잎은 필요 없네요 저는 떨어집니다 그리고 사라집니다 안녕

편린 2022.02.13

여름밤 청계천에서 너와 나

위험하지도 않은 청계천 징검다리를 손 잡고 걸었다 건너서도 모르는 척 손을 놓지 않았다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분위기 물소리에 녹아내리는 사람들의 대화 냇물에 비추는 몽롱한 야경 그리고 한 손에 잡힐 듯 얇은 발목을 드러내며 곁으로 곁으로 다가오는 네가 좋았다 이 미묘한 공기를 깨고 싶지 않아 대화도 없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한참을 손만 잡고 걸었다 거짓말 가득한 그날 밤 청계천은 더 반짝이고 네가 더 사랑스럽고 나는 더 떨렸다

2022.02.13

붉은 마음

마음에는 색이 있다 색이 섞여 변하듯 마음도 섞여 변한다 무채색인 내게 붉은 네가 와서 난 빨개지고 있다 처음에는 시나브로 약하게 시간 흐를수록 강하고 선명하게 결국 너보다 붉어진 나 이제 색 빠진 너는 붉게 해 줄 빛을 향해 나아가고 이미 붉어져 제가 된 나는 이곳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가엾은 붉은 마음 내 속에 갇혔네* * 빈집(기형도) 마지막 문장 구조 참조

2022.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