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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 아무 일도 없었다

2 작년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도 아무 일 없었다. 그 전해에도 아무 일 없었다. 이런 재미있는 시가 전쟁이 끝난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지금 떠올려도 참으로 온갖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역시나 아무 일 없었던 것도 같다. 나는 전쟁에 관한 추억은 이야기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다.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18년 간 몇 번의 이사를 하고 차와 집을 사고 적지 않은 연인을 만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금방 익숙해져서 처음부터 이 상태였던 것 같고, 가족을 꾸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의 기쁨과 의무감도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몸이 쇠약해진 것만 빼곤 근본적으로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아.. 약해진다는 게 돌이킬 수 없는..

명문과 단상 2022.09.13

올 가을도 춥다

한국은 벌써 가을입니다. 저는 이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긴소매를 입습니다. 태생적으로 몸이 차가워 기온이 떨어지면 금세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무뎌지는데, 그때부터 흘러버린 시간의 허무함과 혼자라는 외로움이 커집니다. 그래서 가을이 싫고 겨울이 되면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고 싶어 진답니다. 머, 떠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지만요. 올해는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만남을 해봤고 데이팅 앱에서 마음이 통했던 사람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제가 아름답지 않아서 인지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특이한 생명체를 대하듯 저를 관조하기만 해서 저는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앞에서는 몇 시간씩 웃고 이야기하는데 돌아서면 자기 생활을 하나도 말해주지 않거나, 바로 어제까지 ..

편린 2022.08.28

빗물의 의지

폭우가 연일 쏟아졌던 날 창틀 사이로 빗물이 고였다 빗물은 유리창 밑을 가득 적셔 여닫을 때마다, 끼이익 마찰음 소리를 내고 먼지 섞인 흙과 그 위에 잠들어 있던 날벌레 모기 그리고 알지 못하는 작은 유충을 물에 태워 방에 쏟아 냈다 나는 걸레로 그것을 치우면서야 비가 오면 항상 물이 고이는 걸 알았다 여짓것 뜨거운 태양이 물을 증발시켰는데 이번 폭우는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창문을 열었을 때, 검푸른 사체가 섞인 빗물은 역겨웠다 하지만 그 더러움이 없었다면 빗물이 쌓이는 걸 알지도 못했겠지 어쩌면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보다 추하더라도 꿋꿋하게 존재하는 것이 사랑받는 방법일지 모른다 그것이 혐오일지라도 무관심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폭우 속에서 빗물을 마주했던 나는 빗물의 의지를 배워 오늘 하루를 살아낸다.

2022.08.12

4.인간 실격 -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세 번째 수기 “끊겠어. 내일부터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을 꺼야.” “정말?” “꼭 끊을꺼야. 끊으면 말이야. 요시코 내 각시가 돼 줄래?” 각시 애기는 농담이었습니다. “물론이죠” “요시코 미안 마셔버렸어” “어머 장난치지 말아요. 술 취한척 하고” “아니야 내게는 자격이 없어. 각시가 되어 달라고 한 것도 단념하는 수밖에. 얼굴을 봐, 빨갛지? 정말로 마셨다니까” “그야 석양이 비치니까 그렇죠. 날 속이려 해도 안될걸요? 어제 약속했는데 마실 리가 없잖아요? 손 가락 걸고 약속한 걸요. 술을 마셨다니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렇게 해서 저희는 이윽고 결혼했고, 그로써 얻은 기쁨은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온 비애는 처참이라고 해도 모자랄 만큼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습니다. ..

명문과 단상 2022.08.12

3.인간 실격 - 세상에 대한 정의

세 번째 수기 호리키는 그날 도회지 사람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저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타산적인 약삭빠름입니다. "볼일이라니, 뭔데?" "이봐, 이봐. 방석 실을 끊지 말게." 호리키는 자기네 집 물건이라면 방석 실 하나도 아까운지 겸연쩍은 기색도 없이 그야말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저를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호리키는 지금까지 저하고 교제하면서 무엇 하나 잃은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제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것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

명문과 단상 2022.08.06

2.인간 실격 - 익살 없이 행복해지고 싶지만

두 번째 수기 "나도 그릴 거야. 도꺠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왠지 모르지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감추고 감추어 온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이 사기범의 아내(스네코)와 보낸 하룻밤은 저한테는 행복하고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하루밤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난 저는 원래대로 경박하고 가식적인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

명문과 단상 2022.08.05

1.인간 실격 - 익살로 세상을 살아간다

서문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 석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사나이의 유년 시절이라고나 해야 할까,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때의 사진인데, 굵은 줄무늬 바지 차림으로 여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정원 연못가에 서서 고개를 왼쪽으로 삼십 도쯤 갸우뚱 기울이고 보기 흉하게 웃고 있다. 통속적인 '귀염성' 같은 것이 그 아이의 웃는 얼굴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추에 대한 감식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언뜻 보기만 해도 몹시 기분 나쁘다는 듯이 "정말 섬뜩한 아이군". 하면서 송충이라도 털어내듯 그 사진을 내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두 번째 사진 속의 얼굴. 그건 또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

명문과 단상 2022.08.05

오늘 하루도 위선자가 되어

위선이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선생님을 속이고 지금은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사랑받는 것, 구체적으로 말해 사람들이 제게 주는 관심은 삶의 이유였습니다.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고 거리에서 주운 돈을 경찰서에 돌려주며 다리 다친 친구 가방을 들어줬던 것 모두 관심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에게 멋쩍게 웃으며 별일 아니라고 말했지만 귀는 항상 그들의 대화를 쫓았습니다. 아! 당신의 혀 위에서 저를 끝없이 씹어주세요 따위의 저질스러운 생각이 가득했고 배려 없는 에티켓을 익혔고 또 무언가 착한 척을 하였습니다. 사랑에 중독된 저는 충실한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며 상대가 원하는 이야기를 쏟아 내고 이를 위해 다양한 것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정독해서 여름 성경학..

편린 2022.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