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98

3월 22일 (아빠와 떠난 장사)

3월 22일, 맑지만 바람 "고무 다라이가 왔어요. 김장할 때, 애들 목욕시킬 때 쓰기 편한 다라이입니다. 농사 물을 받아 놓을 수 있는 대형 고무통도 있습니다. 밖에 나와 보세요. 다라이가 왔어요". 오늘 나는 아빠를 따라 장사하러 나왔다. 1.5톤 트럭뒤에, 다양한 크기의 붉은색 대야를 싣고 시골 마을을 지나는 중이다. 지금 시간은 11시, 아직 한 개도 팔지 못했다. 어제저녁 아빠가 안방에서 마이크를 만지작 거리는 걸 봤다. 처음엔 얼마 전에 산 노래방 기기를 트는 건가 했는데, 장사에 쓸 홍보용 테입을 녹음하는 중이었다. 전축과 마이크를 작동시키고, 종이에 적은 장사 멘트를 조심스레 읽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녹음이 어색한지 계속 실수했다. 혀가 꼬이기도 하고, 멘트를 건너뛰기도 해서 30분 넘..

중2 일기장 2023.01.29

3월 21일 (혼자 있는 시간)

3월 21일, 바람 심함 정학 15일, 방과 후 교무실 청소 15일. 멸치를 떄린 결과이다. 나는 보름 넘는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봄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 처음 며칠은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빌려 읽었다. 시간이 많으니까, 한두 페이지 읽고 주인공 모습을 그려보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도 해보았다. 혼자서 여유롭게 지내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못가 지루해졌다. 수업 중에 몰래 보던 만화책의 재미를 따라갈 수 없었다. 역시 책을 읽고 사색하는 건, 바쁜 와중에 짬을 내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오후 2시가 되면 혼자 집에 남게 된다. 아빠는 새벽에 장사하러, 누나와 엄마도 학교와 방직공장으로 떠난다. 엄마는 11시 정도에 내가 먹을 점심을 준비한 후 나가는..

중2 일기장 2023.01.22

3월 17일 (악마를 보았다)

3.17일 비 우리 가족은 상처가 많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육체의 결함이다. 말하자면 장애인 가족이다. 아빠는 왼쪽 다리를 절뚝 거린다. 내 나이즈음에 기차에서 달걀, 맥주 등이 담겨있는 음식카트를 운반하다 선로에 떨어졌다고 한다. 다친 다리는 내 팔뚝보다 얇아서 마치 황새 다리 같다. 옷에 가려져 티나진 않지만, 걷기 시작하면 몸은 위아래로 흔들리고, 술 취한 날은 항상 왼쪽으로 쓰러진다. 그러면 아빠는 "어후우.."라는 한숨을 내쉰 뒤,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오른 다리부터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엄마도 다리에 문제가 있다. 화상이다. 청파동에 있는 작은 봉제공장에서 불이나, 뜨거운 섬유원료가 다리 위로 떨어져 그대로 굳어버렸다. 발목부터 무릎까지, 지렁이 여러 마리가 ..

중2 일기장 2023.01.13

3월 13일 (중학생의 권태)

3월 13일 맑음 또, 일본 누드 잡지를 가져다 내게 내민다. 시시하다. 여자 몸을 보며 떠드는 건 애들이나 하는 짓인데, 친구들은 그걸 알지 못한다. 나는 벌써 중학교 2학년, 14살이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색시를 얻어 장가갈 나이이다. 어엿한 어른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때 즐겨했던 놀이도 땅기지 않는다. 인목이와 NBA 농구를 흉내 내던 것도, 미용실 여자아이와 몰래했던 검은 별 놀이도 이제 흘러간 추억이 되었다. 어제는 철환이가 집에 찾아와 한참 동안 날 불렀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홀로 조용히 사색하며 등교하고 싶었으니까. 확실히 2학년이 되자 많은 게 변했다. 작년 겨울 12cm 넘게 크면서 세상을 내려볼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딴또'라고 놀려대던 애들도 이젠 날 존경으로 대한다...

중2 일기장 2023.01.05

죽어가며 쓰는 글 - 병상육척(마사오카 유키)

병상에 누워 몸을 움직일 수 있었을 때는 애써 병이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무심하게 누워서 지냈지만, 요즘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니, 정신의 번민으로 거의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괴로워한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에 이런저런 궁리도 해 보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도 본다. 점점 더 괴롭다. 머리가 우지끈거린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참고 참다가 끝내 파열한다. 이제 이렇게 되면 어쩔 수가 없다. 절규. 통곡. 점점 더 절규한다. 점점 더 통곡한다. 이 괴로움, 이 고통은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차라리 정말로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만약,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무엇보다 내가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죽을 수도 없고, 죽여줄 사..

명문과 단상 2022.12.30

귤-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이들은 다들 흐린 하늘에 짓눌리기라도 했나 싶을 만큼 하나같이 키가 작았다. 그리고 그 마을 변두리의 음산한 풍경을 닮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며 한꺼번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애처로운 목을 한껏 젖히며 뭔지 모를 고함소리를 열심히 질러댔다. 그런데 그때였다.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그 여자아이가 부르튼 손을 불쑥 내밀어 힘껏 좌우로 흔드는가 싶더니, 순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따스한 햇빛 색으로 물든 귤이 대여섯 개쯤, 기차를 배웅하는 아이들 위로 후두두둑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아이, 아마도 이제부터 남의 집살이를 하러 가는 그 여자아이는 품속에 넣어 둔 몇 개의 귤을 창밖으..

명문과 단상 2022.12.29

정신승리와 자기 혐오의 사이에서

나는 약한 사람이다. 세상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두려워서 정신 승리를 한다. 나는 사람에게 둘러싸여 사랑받는다. 내가 말려도 사람들은 날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나는 그들이 반목하는 걸 슬퍼한다. 그리고 방구석에 누워 창조해낸 세계를 보며 미소 짓는다. 나는 약한 사람이다. 세상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두려워서 자기혐오를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더러운 집에서 혼자 죽는 걸 상상한다. 내 삶은 착실히 나빠져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난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스스로를 비웃는다. 환상의 세계로 도망간다. 끝없이,

편린 2022.12.25

크리스마스 10년 간의 기록

어느 크리스마스 날에.. 저는 어떤 모습일까요? 혼자일까요, 함께일까요. 쓸쓸할까요, 이제 평안에 닿았을까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앞날을 생각하기 전에 과거를 먼저 돌이켜봅니다. 사진첩을 꺼내 12월 24~25일에 촬영된 사진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10년간의 기록을 정리해 봤습니다. * 혼자 떠난 여행 - 4회 * 아무 기록 없음 - 3회 * 친구와 홈 파티 - 1회 * 글쓰기 - 1회 * 썸녀와 콘서트 - 1회 아.. 정말 무색무취한 날의 연속입니다. “여자 친구는 떠나고, 친구들은 바빴고, 저는 혼자 해외로 향했습니다”. 10번의 크리스마스가 한 문장으로 깔끔히 정리됩니다. 여행지에서는 어떤 모습이었나? 저를 촬영한 사진은 없지만 도로, 건물 사진을 보며 떠올려봅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

에세이 2022.12.23

마지막 순간에는 피하지 않을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18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의 마지막 출근길, 오래된 우리 집이 허물어지는 순간, 그리고 아끼던 사람과 작별할 때. 미래를 단정할 순 없지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처럼 마지막을 맞이할 것 같다. 사라지는 게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했을 테니, ‘음... 이제 끝이군’ 되뇌며, 남처럼 상황을 바라볼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거리 두는 법’을 익혔다. 일상을 나눴던 연인이 떠나고, 노력을 기울인 일들이 무의미해지는 경우를 겪으며, 결국 모든 건 사라진다. 남는 건 나 혼자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혼자라면 마음을 다할 필요 없지. 다만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게, 몇 번이고 그때를 먼저 상상하자. 하나가 끝나면 새로운 하나가 시작되고, 삶은..

에세이 2022.12.22

40대, 독거 아재, 오사카 여행기

모든 것이 예상대로 입니다. 저는 혼자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8km를 달립니다. 5시 30분에 일어나 빨지 못한 운동복을 다시 입고, 텐노지(天王寺) 공원을 네 바퀴 돕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 거지처럼 하고 뜁니다. 이곳의 큰 장점 중 하나지요. 대략 세 바퀴 즈음 돌다 보면 저는 제게 취합니다. 해외여행 중에도 자기 관리하는 남자라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셀카를 찍어 봅니다. 그리고 바로 지웁니다. 달리고 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습니다. 샤워하며 생각합니다. 남바로 갈까? 아니야 거긴 너무 분주하지, 엑스포 공원? 1시간이나 걸려, 오사카성? 경복궁하고 같을 듯. 어쩔 수 없이 틴더를 실행합니다. 좋군 좋아 이곳에 인연이 있을지 몰라. 신중히 좋아요를 눌러봅니다. 하지만 매칭이 되지 않네..

에세이 202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