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98

패거리에 내 적이 있다

내 현재 입장에서 말하면, 나는 좋은 친구를 무척이나 원하지만, 아무도 나와 놀아 주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고저'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거짓말이고, 나는 내 나름대로 '패거리'의 괴로움을 예감하고는 오히려 '고저'를 택하는 편이, 이것도 결코 좋은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게 사는 편이 마음 편한 것 같았기에 굳이 친구 관계를 맺지 않은 것뿐이다. 그래서 '패거리'에 대해 조금 더 말하고 싶다. 나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건, 같은 '패거리' 일당의 멍청함을 멍청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칭찬해야 하는 의무에 대한 부담감이다. 싸잡아 말해 미안하지만, '패거리'란 밖에서 볼 때는 소위 '우정'으로 맺어지고, 응원단의 박수처럼 걸음걸이도 말투도 서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정작 가장..

명문과 단상 2023.03.17

나만의 왕국을 세우자

이가 흐물흐물 빠지고, 등은 굽고, 천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온 힘을 다해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초라하고 늙은 악사를 보고 당신은 비웃을 수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이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나는 애초부터 실패했다. 하지만 예술, 이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너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지만, 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것을 밝혀낼 것이다. 한 남자가 평생의 업으로 삼기에 충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리의 악사에게는 거리의 악사만의 왕국이 있는 것이다. (갈매기) 타인과 비교할 필요 없다. 어떤 사람을 시샘하든 동경하든 난 그가 될 수 없다. 내게 주어진 길, 이 길을 가는데도 시간은 짧다.

명문과 단상 2023.03.12

예술은 쌓이는게 아니다

나는 노인에게 감탄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해 질 녘 공중목욕탕의 세면장 한구석에서 혼자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보니까, 허술한 일본식 면도날로 수염을 깎고 있다. 거울도 없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침착하게 깎고 있다. 그때만큼은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감탄했다. 수천 번, 수만 번이라는 경험이 노인에게 거울도 없이 손으로 더듬어 가며 얼굴의 수염을 수월하게 깎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렇게 쌓여 온 경험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이길수 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한 뒤로 주의 깊게 살펴보니, 예순이 넘은 집주인 할아버지 역시 뭐든지 모르는 게 없다. 정원수를 옮겨 심는 계절은 장마철이 최고라는 둥, 개미를 퇴치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둥, 대단히 박식하다. 우리보다 마흔 번..

명문과 단상 2023.03.12

진실을 말할 뿐이다

촌스러운 사람은 어떻게든 세련된 것을 해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요령과 기지를 동경하는 것이다. 촌스러운 사람은 촌스러운 대로 글을 써야 한다. 그럴 때, 요령과 기지 따위를 가진 무리들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훌륭한 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덴구) 진실을 말해야 한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을 느낀 대로 표현해야 한다. 어설퍼도 나만의 메시지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명문과 단상 2023.03.05

작가는 호흡하듯 글을 써야 한다

나는 당신에게 "작가는 글을 써야 한다"라고 거듭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 말은 결코 걸작 한 편을 쓰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걸작 한 편만 쓸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 그런 글은 없습니다. 작가는 걸음을 걷듯이 항상 글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생활과 같은 속도로, 호흡과 같은 박자로, 끊임없이 걸어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면 한숨 돌릴 수 있을까, 이걸 한 편 쓰면 당분간은 으스대며 게으름 피워도 될까. 그런 건 학교 시험공부 같은 것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습게 보는 겁니다. 지위나 자격을 얻으려고 작품을 쓰는 것도 아니겠지요. 살아가는 것과 같은 속도로, 안달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끊임없이 글을 써 나가야 합니다. 졸작이니 걸작이니 범작이니 하는 것은 훗날 사람들이..

명문과 단상 2023.03.05

사랑은 관심이지 않을까

'사랑한다'는 감정은 이성 간에 '연애' 이전에, 또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성 간에 연애가 아닌 '사랑한다'라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좋아한다. 사랑스럽다. 반한다. 생각한다. 연모한다. 애태운다. 매혹된다. 묘해진다. 이런 것들 전부 연애가 아닐까. 이런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이성 간에 '사랑한다'라는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말일까. (찬스) 남녀 간의 애정도 사랑의 범주에 속하니까, 연애에만 국한된 특별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 관심이 있다면 상대를 깊이 바라보게 되고 그를 더 이해하게 된다. '너한테 관심 있어'라는 말은 가볍게 들리지만, 가장 순수한 사랑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명문과 단상 2023.03.01

사랑할 자격은 영원하다

자신이 아직 남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우쭐거릴 수 있는 동안은 삶의 보람도 있고, 이 세상도 즐겁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자신이 남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분명히 자각한다 해도,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해도, 남을 '사랑할 자격'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겸허는 사랑하는 기쁨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받는 기쁨만을 바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야만적이고 무지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낭만등불)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기에 나도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그래서, 가치있는 인간이라고 외치고 싶은거 아닐까.

명문과 단상 2023.02.28

헌신이란 (다자이 오사무 - 판도라의 상자)

헌신이란 그저 무턱대고 절망적인 감상으로 자신을 몸을 죽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큰 착각이다. 헌신이란 자신의 몸을 영원히 살리는 것이다. 인간은 그 순수한 헌신에 의해서만 불멸한다. 하지만 헌신은 어떠한 준비도 필요 없다. 오늘 바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바쳐야만 한다. 농부는 괭이를 들고 밭에서 일하는 모습 그대로 헌신해야 한다. 자신의 모습을 꾸며서는 안된다. 헌신은 유예가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한순간 한순간이 헌신이어야만 한다. 어떤 순간이든 마음을 다해 행하면 된다. 마음이 뜨는 건 쓸데없는 가치판단(이런 일은 내게 안맞아 등) 때문인데,

명문과 단상 2023.02.19

4월 4일 (학원에서 알게된 아이)

4월 4일, 완연한 봄 날씨 지난주부터 학원을 다니고 있다. 집 근처에 있는 고려 속셈학원에서 수학을 배우는 중이다. 아직 2학년 이긴 하지만, 내년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틈틈이 공부를 해야 한다. 만일 연합고사에 실패해 공고나 실고에 가야 한다면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다. 촌스러운 교복을 입고 싶지도 않고, 쓸데없는 걸 배울 바엔 아빠와 장사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공고나 실고에 들어가면, 3학년부터 업체 실습에 나가서 거의 무보수로 일하다, 잘해야 그 작은 업체의 직원이 되는데 이런 빤한 삶을 살고 싶진 않다. 다행히 윤 선생님이 기본 개념과 문제풀이를 반복해 줘서, 서서히 수학에 눈 뜨고 있는 중이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학원이라 원장 선생님과 단과 선생님 모두 열심히다. 얼마 전에는 학원..

중2 일기장 2023.02.14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까?

국민학교 시절, 사촌 누나가 "사람은 다 죽어"라고 내게 말했다. 시크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나는 그때 너무 놀라서 엄마에게 달려가 "정말 모두 죽는거야? 라고 되물었고, 엄마는 아무말 없이 날 안아주었다. 11살 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백구가 얼어 죽고, 휠체어를 타고 놀이터에 오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살아있는 건 결국 사라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단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내 삶에서 죽음은 하나씩 실체화 되었다. 처음엔 이름 모른 친척이 죽었고, 그 다음엔 같이 살던 할머니가, 나보다 어린 사촌동생이 그리고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성당 묘지에 묻으며, 내게 "주님 곁으로 가셨다. 그곳에선 마음대로 걷고, 훈장 노릇을 하며 지낼게다. 이곳보다 좋을거야"라..

편린 2023.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