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과 단상 36

사양 - 아무 일도 없었다

2 작년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도 아무 일 없었다. 그 전해에도 아무 일 없었다. 이런 재미있는 시가 전쟁이 끝난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지금 떠올려도 참으로 온갖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역시나 아무 일 없었던 것도 같다. 나는 전쟁에 관한 추억은 이야기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다.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18년 간 몇 번의 이사를 하고 차와 집을 사고 적지 않은 연인을 만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금방 익숙해져서 처음부터 이 상태였던 것 같고, 가족을 꾸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의 기쁨과 의무감도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몸이 쇠약해진 것만 빼곤 근본적으로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아.. 약해진다는 게 돌이킬 수 없는..

명문과 단상 2022.09.13

4.인간 실격 -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세 번째 수기 “끊겠어. 내일부터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을 꺼야.” “정말?” “꼭 끊을꺼야. 끊으면 말이야. 요시코 내 각시가 돼 줄래?” 각시 애기는 농담이었습니다. “물론이죠” “요시코 미안 마셔버렸어” “어머 장난치지 말아요. 술 취한척 하고” “아니야 내게는 자격이 없어. 각시가 되어 달라고 한 것도 단념하는 수밖에. 얼굴을 봐, 빨갛지? 정말로 마셨다니까” “그야 석양이 비치니까 그렇죠. 날 속이려 해도 안될걸요? 어제 약속했는데 마실 리가 없잖아요? 손 가락 걸고 약속한 걸요. 술을 마셨다니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렇게 해서 저희는 이윽고 결혼했고, 그로써 얻은 기쁨은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온 비애는 처참이라고 해도 모자랄 만큼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습니다. ..

명문과 단상 2022.08.12

3.인간 실격 - 세상에 대한 정의

세 번째 수기 호리키는 그날 도회지 사람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저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타산적인 약삭빠름입니다. "볼일이라니, 뭔데?" "이봐, 이봐. 방석 실을 끊지 말게." 호리키는 자기네 집 물건이라면 방석 실 하나도 아까운지 겸연쩍은 기색도 없이 그야말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저를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호리키는 지금까지 저하고 교제하면서 무엇 하나 잃은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제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것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

명문과 단상 2022.08.06

2.인간 실격 - 익살 없이 행복해지고 싶지만

두 번째 수기 "나도 그릴 거야. 도꺠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왠지 모르지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감추고 감추어 온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이 사기범의 아내(스네코)와 보낸 하룻밤은 저한테는 행복하고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하루밤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난 저는 원래대로 경박하고 가식적인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

명문과 단상 2022.08.05

1.인간 실격 - 익살로 세상을 살아간다

서문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 석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사나이의 유년 시절이라고나 해야 할까,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때의 사진인데, 굵은 줄무늬 바지 차림으로 여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정원 연못가에 서서 고개를 왼쪽으로 삼십 도쯤 갸우뚱 기울이고 보기 흉하게 웃고 있다. 통속적인 '귀염성' 같은 것이 그 아이의 웃는 얼굴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추에 대한 감식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언뜻 보기만 해도 몹시 기분 나쁘다는 듯이 "정말 섬뜩한 아이군". 하면서 송충이라도 털어내듯 그 사진을 내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두 번째 사진 속의 얼굴. 그건 또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

명문과 단상 2022.08.05

사람, 사물, 관념과 거리를 두는 것

누군가 나를 부른다. 내가 필요하거나 내게 관심 있어서.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 표현하고 때문에 불러주는 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호명되는 순간 나는 한정된다. 아들 또는 오빠로서 역할이 주어지고 그 길을 가야 한다. 어쩌면 호칭은 사랑이 아니라 부르는 사람이 나를 마음것 쓰기 위한 족쇄 일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면 그건 너무 외롭다. 나는 족쇄를 싫어하면서도 원한다. 호명되지 않는 기쁨 (정다연)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나는 호명되지 않은 채 길을 걸어 아무도 지금 내가 어떤 모자를 쓰고 있는지, 내 머릿속에 어떤 구름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이름인지 알 수 없지 아무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서로를 멈춰 세우지 않고도 그대로 스쳐 지나갈 수 있어 섣불리 부를 ..

명문과 단상 2022.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