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과 단상 36

나만의 왕국을 세우자

이가 흐물흐물 빠지고, 등은 굽고, 천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온 힘을 다해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초라하고 늙은 악사를 보고 당신은 비웃을 수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이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나는 애초부터 실패했다. 하지만 예술, 이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너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지만, 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것을 밝혀낼 것이다. 한 남자가 평생의 업으로 삼기에 충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리의 악사에게는 거리의 악사만의 왕국이 있는 것이다. (갈매기) 타인과 비교할 필요 없다. 어떤 사람을 시샘하든 동경하든 난 그가 될 수 없다. 내게 주어진 길, 이 길을 가는데도 시간은 짧다.

명문과 단상 2023.03.12

예술은 쌓이는게 아니다

나는 노인에게 감탄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해 질 녘 공중목욕탕의 세면장 한구석에서 혼자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보니까, 허술한 일본식 면도날로 수염을 깎고 있다. 거울도 없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침착하게 깎고 있다. 그때만큼은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감탄했다. 수천 번, 수만 번이라는 경험이 노인에게 거울도 없이 손으로 더듬어 가며 얼굴의 수염을 수월하게 깎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렇게 쌓여 온 경험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이길수 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한 뒤로 주의 깊게 살펴보니, 예순이 넘은 집주인 할아버지 역시 뭐든지 모르는 게 없다. 정원수를 옮겨 심는 계절은 장마철이 최고라는 둥, 개미를 퇴치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둥, 대단히 박식하다. 우리보다 마흔 번..

명문과 단상 2023.03.12

진실을 말할 뿐이다

촌스러운 사람은 어떻게든 세련된 것을 해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요령과 기지를 동경하는 것이다. 촌스러운 사람은 촌스러운 대로 글을 써야 한다. 그럴 때, 요령과 기지 따위를 가진 무리들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훌륭한 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덴구) 진실을 말해야 한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을 느낀 대로 표현해야 한다. 어설퍼도 나만의 메시지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명문과 단상 2023.03.05

작가는 호흡하듯 글을 써야 한다

나는 당신에게 "작가는 글을 써야 한다"라고 거듭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 말은 결코 걸작 한 편을 쓰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걸작 한 편만 쓸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 그런 글은 없습니다. 작가는 걸음을 걷듯이 항상 글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생활과 같은 속도로, 호흡과 같은 박자로, 끊임없이 걸어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면 한숨 돌릴 수 있을까, 이걸 한 편 쓰면 당분간은 으스대며 게으름 피워도 될까. 그런 건 학교 시험공부 같은 것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습게 보는 겁니다. 지위나 자격을 얻으려고 작품을 쓰는 것도 아니겠지요. 살아가는 것과 같은 속도로, 안달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끊임없이 글을 써 나가야 합니다. 졸작이니 걸작이니 범작이니 하는 것은 훗날 사람들이..

명문과 단상 2023.03.05

사랑은 관심이지 않을까

'사랑한다'는 감정은 이성 간에 '연애' 이전에, 또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성 간에 연애가 아닌 '사랑한다'라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좋아한다. 사랑스럽다. 반한다. 생각한다. 연모한다. 애태운다. 매혹된다. 묘해진다. 이런 것들 전부 연애가 아닐까. 이런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이성 간에 '사랑한다'라는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말일까. (찬스) 남녀 간의 애정도 사랑의 범주에 속하니까, 연애에만 국한된 특별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 관심이 있다면 상대를 깊이 바라보게 되고 그를 더 이해하게 된다. '너한테 관심 있어'라는 말은 가볍게 들리지만, 가장 순수한 사랑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명문과 단상 2023.03.01

사랑할 자격은 영원하다

자신이 아직 남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우쭐거릴 수 있는 동안은 삶의 보람도 있고, 이 세상도 즐겁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자신이 남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분명히 자각한다 해도,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해도, 남을 '사랑할 자격'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겸허는 사랑하는 기쁨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받는 기쁨만을 바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야만적이고 무지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낭만등불)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기에 나도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그래서, 가치있는 인간이라고 외치고 싶은거 아닐까.

명문과 단상 2023.02.28

헌신이란 (다자이 오사무 - 판도라의 상자)

헌신이란 그저 무턱대고 절망적인 감상으로 자신을 몸을 죽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큰 착각이다. 헌신이란 자신의 몸을 영원히 살리는 것이다. 인간은 그 순수한 헌신에 의해서만 불멸한다. 하지만 헌신은 어떠한 준비도 필요 없다. 오늘 바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바쳐야만 한다. 농부는 괭이를 들고 밭에서 일하는 모습 그대로 헌신해야 한다. 자신의 모습을 꾸며서는 안된다. 헌신은 유예가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한순간 한순간이 헌신이어야만 한다. 어떤 순간이든 마음을 다해 행하면 된다. 마음이 뜨는 건 쓸데없는 가치판단(이런 일은 내게 안맞아 등) 때문인데,

명문과 단상 2023.02.19

죽어가며 쓰는 글 - 병상육척(마사오카 유키)

병상에 누워 몸을 움직일 수 있었을 때는 애써 병이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무심하게 누워서 지냈지만, 요즘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니, 정신의 번민으로 거의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괴로워한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에 이런저런 궁리도 해 보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도 본다. 점점 더 괴롭다. 머리가 우지끈거린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참고 참다가 끝내 파열한다. 이제 이렇게 되면 어쩔 수가 없다. 절규. 통곡. 점점 더 절규한다. 점점 더 통곡한다. 이 괴로움, 이 고통은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차라리 정말로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만약,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무엇보다 내가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죽을 수도 없고, 죽여줄 사..

명문과 단상 2022.12.30

귤-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이들은 다들 흐린 하늘에 짓눌리기라도 했나 싶을 만큼 하나같이 키가 작았다. 그리고 그 마을 변두리의 음산한 풍경을 닮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며 한꺼번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애처로운 목을 한껏 젖히며 뭔지 모를 고함소리를 열심히 질러댔다. 그런데 그때였다.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그 여자아이가 부르튼 손을 불쑥 내밀어 힘껏 좌우로 흔드는가 싶더니, 순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따스한 햇빛 색으로 물든 귤이 대여섯 개쯤, 기차를 배웅하는 아이들 위로 후두두둑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아이, 아마도 이제부터 남의 집살이를 하러 가는 그 여자아이는 품속에 넣어 둔 몇 개의 귤을 창밖으..

명문과 단상 2022.12.29

인간, 다자이 내 마음의 문장들

어른이란 외로운 사람이다. 서로 사랑하고 있어도 조심하면서 남남처럼 서먹서먹하게 대해야 한다. 어째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보기 좋게 배신을 당해 큰 창피를 겪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이 발견은 청년이 어른으로 옮겨가는 첫 번째 과정이다. 어른이란 배반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쓰가루) '인간은 왜 서로를 평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이런 소박한 의문에 대해 느긋하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한다. '모래밭의 싸리꽃도, 기어가는 작은 게도, 강가에 쉬는 기러기도, 그 무엇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을 서로 존경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

명문과 단상 2022.11.21